4월 4일 인도양 공해상. 이라크 바스라에서 원유를 싣고 미국 루이지애나로 향하던 32만 t급 유조선 삼호드림호 갑판 아래에 있던 선원들은 총성과 동료 선원들의 비명을 들었다. 순식간에 흑인들이 유조선을 점령했다. 손쓸 틈이 없었다. 휴대전화도 빼앗겼다. 말로만 듣던 해적이었다. 40∼50명 정도 됐다. 이들은 나흘간 배를 몰더니 소말리아 연안에 배를 댔다. 육지로 끌고 가지 않고 배 안에 선원들을 가뒀다. 한국인 선원 5명과 외국인 19명의 기나긴 피랍생활이 시작됐다. 식사는 하루 두 끼. 안남미(安南米) 비슷한 쌀이나 밀가루죽 등으로 연명했다. 채소는 가끔 양파만 구경했다. 살려고 먹었다. 쇠고기, 닭고기, 우유, 술 등 3개월 치 부식이 배에 있었지만 해적들이 다 먹어치웠다.
틈만 나면 협박을 해댔다. 영어를 하는 해적 한 명이 통역을 했다. “한국은 미국처럼 잘살지 않느냐? 왜 빨리 너희들 목숨 값이 안 오냐? 빨리 돈을 부치라고 해라”며 머리에 총구를 들이댔다. 가슴 부위도 툭툭 찔렀다. 칼로 사람의 목을 베는 동영상도 보여줬다. “돈을 빨리 주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렇게 될 것”이라며 험악한 인상을 썼다. 정말 그렇게 할 것 같아 겁이 났다. 해적들의 감시 때문에 좁은 공간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선원들의 몸은 점점 굳어갔다.
○ 정신적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선원들
피랍 216일 만에 소말리아 해적에게 풀려난 삼호드림호 김성규 선장(56) 등 한국인 선원 5명이 겪었던 피랍생활의 극히 일부다. 구체적인 장면은 입에 담기도 싫다고 했다. 한 선원은 “만약 외부에 난 상처라면 수술로 봉합하면 되지만 7개월가량의 억류생활은 수술로도 회복하기 힘든 고통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광주에서 치료 중인 1기사 임모 씨(35·이하 이름은 모두 익명)를 제외한 나머지 선원들은 부산 모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 7개월간 제대로 먹지 못해 선원들은 귀국 당시 영양실조 상태였다. 장기간의 억류로 근육과 관절이 제 기능을 못해 매일 물리치료를 받는다. 며칠에 한 번씩 정신과 치료도 받고 있다. 5명 모두 불면, 초조, 극도의 불안 증세를 호소하고 있다. 자다가도 ‘으악’ 하며 소스라치게 놀라 깬다. 기관장 김모 씨(62)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때 그곳 주민들은 포탄이 쏟아지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끔찍한 하루를 보냈을 것”이라며 “우리는 해적들의 위협과 공포 속에서 7개월 넘게 그런 생활을 했다”고 회고했다. 선원들은 외부 노출을 꺼렸다. 김 선장은 “지금은 인터뷰할 상황이 아니다”고 거부했다. 김 선장은 20일 눈 수술을 받았다. 한 선원은 “정부나 선사에 정말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곧 선사인 삼호해운과 보상 협상을 할 계획이다.
○ 철조망에 해적보험 가입까지
국내의 한 해운사는 위험 항로인 아프리카 아덴 만을 운항할 때 액화천연가스(LNG)선과 탱커에 해적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날카로운 철조망을 둘렀다. 또 다른 해운사는 최근 선박에 물대포를 장착해 성능 실험을 하고 있다. 선박으로 올라오는 해적들에게 압력이 강한 물대포를 쏴 떨어뜨리는 방식. 모두 해적들을 막기 위한 자구책이다.
현대해상이 국내 처음으로 선보인 해적보험에도 가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최근 창명해운, STX팬오션, 대한해운, 대림코퍼레이션 등이 이 보험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진해운, 현대상선 등 대형 해운사는 선단(fleet) 단위로 국내외 해적보험에 가입했다. 일단 해적들에게 납치되면 선박 값과 선원 몸값으로 최소 100억 원 이상 지불해야 하는 등 손실이 크기 때문에 이런 판단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 관계자는 “아직 영세업체들은 비용 부담 때문에 이런 자구책 마련에 머뭇거리기도 한다”고 전했다.
○ 정부 “선원 피난처 설치 검토”
정부도 소말리아 해적 납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제도 마련에 나섰다. 정부 당국자는 22일 “선박에 보안요원을 태우거나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한 ‘선원 피난처’ 설치 등 자구책을 제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외교통상부, 국방부, 국토해양부, 국가정보원 등 관계 부처는 최근 소말리아 해적피랍 재발방지대책회의를 열었다. 한 당국자는 “정부는 선박 자구책 마련 의무화를 위한 구체적인 법률이나 시행 지침을 1월까지 마련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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