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이런 고집이 다 있나 싶었다. 나홍진 감독은 전작인 '추격자'와 같은 장르에, 같은 분위기에, 같은 주연배우를 캐스팅하여 '황해'를 찍었다. 아무리 전작이 대박을 터뜨렸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고집스러운 것 아닌가. 아니면 전작의 성공에 너무 기대는 것이든지.
뭐 이런 배짱이 다 있나 싶기도 했다. 필모그래피가 단 한편뿐인 이 젊은 감독이, 대박 아니면 쪽박인 한국영화시장에서 대규모 제작비를 끌어들여 영화를 만들었다. 야심도 능력인 건가. 이건 엄청난 축복이면서도 숨 막히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한동안 업계에서는 이 영화에 대해 무수한 소문이 돌았다. 많은 제작비를 들인데다가 170회차의 촬영횟수, 300일이 넘는 촬영기간, 그리고 2년 전 강렬한 데뷔작으로 단박에 유명세를 탄 신인감독의 영화이니 무리도 아닐 것이다.
떠도는 소문은 늘 그렇듯 대부분 흉흉했지만, 진실과 시기와 왜곡과 우려가 버무려졌을 이런 소문이 난무한다는 것은 그만큼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 밀도 높은 추격의 실타래
이렇게 탄생한 나홍진 감독의 두 번째 영화 '황해'는 지독한 영화다. 재미있다거나 훌륭하다는 표현보다는 어쩐지 이 단어가 잘 어울린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그러하거니와 영화 전체에 스며있는 음산함도 그렇다.
156분이라는 러닝타임에도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는 이야기의 짜임새도 그러하고, 쓴 한숨을 내쉬게 하는 결말 역시도 그렇다.
소재는 독특하다. 살인을 청부 받은 조선족 구남(하정우)이 황해를 건너 밀입국을 한다. 하지만 자신이 죽이려 했던 목표물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오히려 살인자의 누명을 쓰게 되고, 자신의 뒤를 쫓는 경찰의 눈을 피해 이 사건의 근원 세력을 추격한다.
또 다른 청부살인을 의뢰했던 김태원(조성하)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구남을 추격한다. 그리고 애초 구남에게 살인을 지시했던 면가(김윤석)는 김태원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구남을 추격한다.
전작인 '추격자'가 연쇄 살인범과 이를 뒤쫓는 전직 형사라는 단순한 구조였다면, '황해'는 그 추격의 범위가 한층 넓어지고 복잡해졌다. 추격의 대상 역시 추격자와 도망자라는 이분법적인 구조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추격하는 다층적인 구조가 되었다.
그리고 이를 풀어가는 감독의 연출력도 한층 성숙해졌다. 바다를 건너고 반도의 끝과 끝을 오가면서 펼쳐지는 밀도 높은 추격의 실타래는, 이 긴 영화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해나가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추격의 한 가운데에는 구남이 서 있다. 그리고 그 구남이 된 하정우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연변의 한 택시기사에서 살인자가 되고 또 다시 도망자가 되는 한 남자의 구구절절 한 운명을 무척이나 건조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그려내었다.
죽음을 직감한 채 자신이 왜 이런 운명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뒤쫓는, 그러면서도 사라진 아내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찾아 헤매는 남자의 절박함이 그의 눈빛에 고스란히 스며있다.
물론 이는 또 한번 훌륭한 콤비를 이루어낸 김윤석과, 이 강렬한 두 남자 사이에서 조화를 이끌어낸 조성하의 연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 조선족들의 사연 삼킨 '무덤'의 상징, 황해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에는 한 가지 눈 여겨 볼 사실이 있다. 바로 모든 문제의 근원은 황해의 동쪽 편, 바로 한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구남이 빚에 시달리게 된 것은 아내가 한국으로 돈 벌러 가기 위해 거액이 드는 비자를 만들었기 때문이었고, 최초의 살인 청부 의뢰도 바다건너 한국에서 왔다.
구남을 이용하고 버렸던 연변의 면가가 다시 구남을 추격하게 된 것은 사건을 덮으려던 김태원의 욕심 때문이었고, 이 와중에 드러난 또 다른 음모 역시 한국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구남이 황해를 건너는 과정은 지금도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조선족들의 처참한 밀입국 과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운 좋게) 밀입국에 성공한 후엔 우리 사회에서 어떠한 현실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지 역시 구남의 행보 속에서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다. 중국 땅에서 차별과 가난에 시달리던 그들의 삶은 한국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황해'란 우리 사회의 어두운 욕망이 흘러 들어가는 배출구이자 조선족들의 수많은 사연을 삼켜버린 무덤의 상징과 같다. 전작 '추격자'에서 출장 안마소와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비참한 삶을 보여주었던 나홍진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그 무대와 대상을 연변과 조선족으로 옮겨 또 한번 우리 사회의 어두운 치부를 들추어낸다. 그의 영화가 단순히 스릴러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시선에 따스함이 담겨있는가 하는 질문은 별도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는 사회의 밑바닥을 파헤치고 그 이면을 들여다보지만, 그 곳에서 가장 큰 피해의 대상이 되는 여성은 단순히 성적인 대상으로만 보는 마초적 시선을 고수한다.
하층민의 삶과 제도권 밖 세계에서 인간사의 아이러니를 끌어내는 솜씨는 탁월하지만, 여기에는 섬뜩한 냉정함이 도사리고 있다. 이는 애초에 영화를 통해 어떠한 담론을 제시하려 노력하지 않는 감독의 의도된 연출인지도 모른다.
▶ 산만함, '급마무리'는 아쉬움으로 남아
영화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나뉜다. 초반 에피소드에서는 구남을 중심으로 사건의 전개가 이루어지고, 후반에는 그 사건의 배후와 원인이 밝혀지는 전형적인 스릴러의 구조를 띠고 있다.
아쉬운 점은 밀도 있게 전개되어 가는 초반부와 달리 후반부에는 사건의 갈래가 너무 많아지면서 다소 산만해진다는 것이다. 대규모 액션과 자동차 추격신의 스펙터클은 무척이나 볼 만하지만, 오히려 너무 후반부에만 빈번하게 집중되어 있는 까닭에 완급조절에 실패한 느낌을 준다.
초반부 관객을 압도하는 패를 쥐고 러닝타임까지 늘렸음에도 후반부에 가서 숨가쁘게 마무리 짓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감독답게 미장센은 무척이나 사실적이다. 흔들리는 카메라 워크와 속도감 있는 편집은 이 길디 긴 영화에 역동성을 더한다. 장면 장면 살아있는 디테일에서는 감독의 노력과 스태프들의 땀이 진하게 느껴진다.
물론 때로 너무 현란해 스토리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집착이 과욕으로 변한 건, 영화 속 주인공들만이 아니었나 보다.
그나저나 올해 한국영화의 키워드는 '폭력'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현재까지 한국영화 최고의 관객수를 기록한 '아저씨'부터 '의형제' '악마를 보았다' '심야의 FM' 그리고 '부당거래'까지, 올해 관객 좀 들었다 하는 한국영화에는 여지없이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폭력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황해'가 장식할 것이다. 장르적 터치가 없기에 더욱 잔혹하고, 더욱 노골적인 '생 날것'의 폭력으로 말이다.
정주현 영화진흥위원회 코디네이터 janice.jh.ch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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