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방송계만큼 화려한 조명을 받지는 못하지만 연극계에도 연말 발표되는 3대 연극상이 있다. 최고의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동아연극상과 한국연극 100년을 기념해 2008년 제정된 대한민국연극대상, 그리고 매년 딱 2명의 연극인만 선정하는 히서연극상이다. 연극계에서 ‘그랜드 슬램’은 이 3개 상을 동시 석권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해 말 그 그랜드 슬램에 성공한 연극인이 나왔다. 동아연극상 유인촌신인연기상, 대한민국연극대상 신인연기상, 히서연극상 기대되는 연극인상을 휩쓴 배우 박완규 씨(34)다.
“히서연극상 발표가 나고 주변분들이 저보다 더 좋아하시는 것을 보고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대한민국연극대상 발표를 앞두고는 슬쩍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마침 제가 출연한 ‘잠 못 드는 밤은 없다’가 작품상을 받게 됐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개인상 이야기는 없더냐’고 물었다가 없더란 말을 전해 듣고 얼굴이 다 빨개졌어요. 그런데 다음 날 수상 통보를 해주는데 정말 통쾌한 기분이었어요.”
절정은 수상 기념 파티가 열린 지난해 12월 30일이었다. 올해 그가 출연한 7편의 연극을 양분한 극단 백수광부와 극단 골목길의 공동 송년회를 겸한 파티가 시작되기 직전 동아연극상 수상 소식까지 날아든 것이다.
“내 출연작들이 심사위원 추천으로 동아연극상 후보작이 됐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보다 먼저 소식을 들은 연극계 선후배들에게서 축하 메시지가 쏟아져 얼떨떨하더군요. 결국 그날 80명분의 술값을 다 냈는데 100만 원 넘는 술값을 내긴 평생 처음이었죠.”
대전 출신으로 대학 졸업 후 뒤늦게 배우를 해보자는 결심으로 상경해 10년간 무명배우 생활을 버텨온 그에게 그만큼 지난 한 해가 최고의 해였다. 180cm의 껑충한 키에 까만 얼굴을 한 그는 2001년 극단 백수광부에 입단한 뒤 주로 거지나 부랑아 역 등 단역과 조역을 맡았다. 그러던 그가 올해엔 당당한 주역으로 왕 역할까지 거침없이 소화한 ‘신데렐라’로 변신한 것이다. ‘고래’의 북한잠수정 부기관장으로 시작해 ‘잠 못 드는 밤은 없다’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하라구치, ‘안티고네’의 크레온 왕, ‘아침드라마’의 남자까지.
그 변곡점은 2009년 ‘뉴욕 안티고네’였다. 폴란드 출신의 뉴욕의 비열한 노숙인 벼룩으로 출연하면서 몸무게를 10kg 감량하고 강렬한 눈빛과 거침없는 열변으로 배우로서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다. 골목길의 박근형 대표가 이 작품을 보고 그를 자신의 연출작에 출연시키기 시작했고 작년 ‘잠 못 드는 밤은 없다’ ‘아침드라마’의 주연 발탁으로까지 이어졌다.
“이성열 대표님이 배우로 제가 뿌리를 내릴 수 있게 강하게 단련시켜 주신 아버지 같은 분이라면 박근형 대표님은 가능성만 보고 단비와 같은 비를 내려주신 어머니 같은 분이세요.”
대전에서 중고교 시절 교회 성극반원으로, 대학에선 영어연극을 하며 나름 연기에 자신이 있었던 그였지만 백수광부에 입단한 뒤 카뮈의 ‘오해’란 첫 공연에 출연하자마자 슬럼프에 빠졌다.
“무대 위 ‘쓰레기’가 따로 없었죠.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몸을 제대로 못 움직이겠는데 관객은 전부 저에게 혀를 내밀고 있는 것 같고.”
그 후 단역이라도 시켜주는 게 고맙다는 생각으로 극단생활에 전념하던 그에게 다시 큰 시련이 닥쳤다. 아침 특별공연이 있던 날 지각을 해 공연을 30분이나 지연시켰던 것. 이성열 백수광부 대표가 이 소식을 듣고 그에게 1년간 극단 출입을 금지시키는 중징계를 내렸다.
“눈앞이 캄캄했죠. 그런 사고를 쳤으니 다른 극단에서 받아줄 리도 없고. 집에만 박혀 지내다 마침 2002 월드컵이 열려 ‘붉은 악마’로 광화문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그러다 신촌의 바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데 8개월 정도 됐을 때 이 대표님이 직접 찾아와 ‘내일부터 다시 나오라’고 징계를 풀어줘 눈물이 날 것 같았죠.”
그는 이때 겪었던 외로움과 절박함이 연기 인생에 큰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잠 못 드는 밤은 없다’의 히키코모리 연기도 이때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백수광부에선 성공하려면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돈다고 한다.
연기상은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받을 수 있지만 신인상은 기회가 왔을 때 못 받으면 다시 기회가 없는 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인상을 석권한 것은 큰 행운이다. 생애 최고의 연말을 보낸 박 씨는 그 행운이 밀물처럼 들이닥쳤다가 썰물처럼 사라지지 않을까 조금 불안하다.
“올 상반기 제 출연작은 차세대 연출가의 인큐베이팅 작품으로 3일만 공연하는 ‘에어로빅 보이즈’와 지방공연까지 장기 앙코르 공연에 들어갈 백수광부의 ‘봄날’ 두 편밖에 없어요. 꼭 좋은 작품을 만나 지금의 연기 감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박근형 대표는 “큰 배우가 되기 위해 누구나 겪는 단계니까 초심을 잃지 말고 길게 바라보는 배우가 되어 달라”고 충고했다. 이성열 대표는 “상은 잘했다고 주기도 하지만 앞으로 더 잘하라는 격려의 뜻도 담겼다”며 “선 굵은 연기뿐 아니라 섬세한 연기를 좀 더 보완해 달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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