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국보급 진서 ‘왕오천축국전’이 숱한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300년 만에 석 달간의 친정나들이로 고국에 돌아왔다. 긴 세월 치고는 너무나 짧은 나들이다.
경인년도 저물어가는 지난해 12월 17일 오후 3시 5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세계문명전 ‘실크로드와 둔황-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 개막식에서 100여 년 전 명사산(鳴沙山)의 삭막한 모래바람을 맞으며 낙타에 실려 파리에 유폐되었던 이 보물이 필자의 눈앞에 그 용자를 드러냈다. 황홀한 친견의 순간, 뇌리에는 이 친견물과의 반세기 이상 이어 온 인연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근 60년이 가까워 오는 대학 시절, 이 여행기가 그저 신라인이 쓴 책이라는데 마음이 끌려 몇 장 뒤적거려 본 것이 그 인연의 단초다. 몇 년 지나서 우연한 기회에 파리국립도서관에 들렸을 때, 동양학 컬렉션이랍시고 진열해 놓은 책더미 속에서 감각적으로 누르스름한 두루마리에 눈길이 멈췄다. 그것을 확인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그 후 한 차례 더 비슷한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 여러 차례 둔황 막고굴(莫高窟)을 찾을 때마다 이 책이 발견된 장경동(17호굴)의 자그마한 문 너머로 모래 속에 켜켜이 파묻혀 있던 여행기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곤 했다.
우리에게 혜초와 같은 시대를 앞선 세계적 문명탐험가와 선구적 세계 여행기가 있다는 것은 겨레의 크나큰 자랑이고 보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혜초의 업적과 여행기의 진가에 비해 우리의 관심과 연구는 너무나 미미했다. 후손으로서 이것이 너무나도 부끄러워 19년 전 모 일간지에 ‘불초(不肖)’라는 제목의 자괴하는 칼럼을 쓰면서 양지 바른 서산 어디에 사적비 하나라도 세웠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토로한 바 있다.
세월이 갈수록 혜초와 여행기는 필자의 심신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학위 논문에서는 혜초의 대식(大食, 아랍) 역방을 논증했고, 15년 전에는 혜초가 마지막 오십 평생을 보내면서 숱한 족적을 남긴 중국 시안(西安) 일원을 곳곳마다 다 둘러봤다. 그러고 나서는 한 불교 전문 출판사와 ‘혜초평전’을 쓰기로 계약까지 맺었으나 뜻밖의 일로 그만 중단되고 말았다. 아쉽기도 하고 무척 죄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분발의 계기이기도 했다.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세계적 여행기의 번역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기왕이면 우리의 것부터’라는 신념에서 그 첫 권으로 ‘왕오천축국전’의 역주본을 내놓게 되었다. 이어 둔황 막고굴 61호동 ‘오대산(五臺山) 전도’에서 단서를 포착하고 혜초의 생애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입적지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 터를 찾아 떠났다.
지난해 5월에는 한국문명교류연구소의 이름으로 ‘혜초기념비’를 건립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마침내 서기(瑞氣) 어린 평택시의 해변가에 아담한 혜초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제 후손으로서 조금이나마 불초의 응어리를 풀었다고 비문에 적어 넣었다. 이번 여행기의 나들이에 맞춰 강윤봉 선생이 쉬운 말로 풀어 쓴 ‘혜초의 대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을 연구소의 청소년 교양총서 시리즈로 발간했다.
비록 변변찮은 지난날의 일들이지만 그것들이 올올이 오늘의 친견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니 짐짓 뿌듯함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러나 견물생심이라, 여행기를 친견하면서 지난날의 회고와 더불어 이 보물을 제대로 예우하지 못한데 대한 자괴감에 가슴이 쓰리기도 했다. 하루 빨리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도 등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앙증맞게도 ‘임시대여’라는 딱지가 붙은 채, 그것도 제 몸의 6분의 1밖에 드러낼 수 없는 불수의 신세로 주인 앞에 나타났다. 감지덕지 이러한 수모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가 측은하기도 하다. 불원간 고국의 품에 영원히 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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