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그리스 아테네 시 네아스미르니 구의 노인회관에서는 우렁찬 노랫소리가 들렸다. 노령연금을 받는 스피로스 미아리스 씨(74), 토마스 산타바시스 씨(67)가 기타를 치고 스타마티스 코코니스 씨(73)가 화음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노래 도중 연금 이야기가 나오자 화음이 깨졌다. 14년 전부터 연금을 받기 시작한 미아리스 씨는 한 달에 1200유로(약 183만 원)를 받고 있지만 재작년에 은퇴한 산타바시스 씨의 연금은 620유로로 그 절반 수준이다. 산타바시스 씨처럼 연금이 적은 노인들을 위해 구에서 별도로 지원하던 800유로 정도의 지원금과 1년에 세 번 나오던 보너스 연금 수당도 올해부터 끊겼다.
산타바시스 씨는 “몇 년 전만 해도 42세부터 연금을 받기 시작한 사람도 많았다”며 “언젠가 연금이 줄어들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다른 유럽연합(EU) 국가보다 연금이 많아 부러움을 샀던 그리스인들은 국가 재정 위기의 한파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시민들은 “다른 EU 회원국보다 관대한 연금 혜택과 방만한 복지기금 운영,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국가 재정을 축내고 있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 절제를 모르던 혜택의 종착역은 구제금융
지난해 경제위기가 닥치기 전 그리스는 ‘남유럽의 신(新)복지 천국’으로 떠올랐다. 근로자들은 60세 전에 은퇴해 퇴직 직전 5년간 월급의 80%를 연금으로 받았다. 연금보험료도 월급의 25% 미만이었다. 당시 월급의 42%를 연금보험료로 내고 평생 월급의 45%를 연금으로 받아 가던 이웃나라 독일의 근로자들도 그리스의 복지체제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현재 그리스에서 이 같은 ‘보편적 복지’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스 국민들은 지난해 EU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 1100억 유로를 받기로 한 뒤부터 혹독한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2000년과 2007년 공적연금 개혁안을 내놓았다. 인구 고령화로 공적연금에 들어가는 정부 예산이 2010년 국내총생산(GDP)의 12%에서 2050년 24%로 두 배 늘어난다는 것이 개혁 추진의 이유였다. 실제로 그리스 정부 예산에서 연금에 지출된 돈은 2000년 129억 유로에서 2010년 153억 유로로 늘어 EU집행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출을 줄이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이런 권고를 매번 무시하고 보다 많은 복지 혜택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양로원에서 만난 디미티라 발라미다 씨(70·여)는 “지금의 경제위기는 복지 공약을 남발한 정치인과 분수 모르고 혜택만 바라던 유권자의 공동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리스의 공적연금 기금은 140개가 넘는 민영회사가 운영한다. 민영회사는 돈이 모자랄 때마다 정부에 손을 벌리고 정부는 민간회사의 재정적자를 예산으로 메워줬다. 방만한 조직은 모럴 해저드를 부채질했다. 취재 도중 3, 4개 연금을 중복 수령하는 연금 가입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한 노인은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혼인신고를 안 해 미혼 자녀에게 나오는 유족 연금을 40년 넘게 받은 사람도 상당히 많다”고 말했다.
EU와 IMF가 약속한 구제금융의 규모는 그리스 GDP의 3분의 1 수준. 구제금융 지원 이후 그리스 정부가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자 그 여파는 연금 수령자뿐 아니라 젊은 세대에도 미치고 있다. 요즘 그리스 대학생들 사이에서 ‘580유로(약 88만9000원) 세대’라는 영화가 화제다. 실업률이 20%까지 치솟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월 580유로의 임시직 찾기도 녹록지 않은 현실을 반영한 영화다. ○ 보편적 복지의 수렁
전문가들은 현재 그리스 사태의 원인으로 정치인들의 포퓰리즘과 83%에 달하는 자영업자의 탈세율을 꼽았다. 엠마누엘 마마차키스 피레우스대 경제학과 교수는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흠뻑 주는 복지체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우고 있다”며 “복지 정책은 한번 빼면 다시 집어넣기 어려운 칼처럼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테네 시에서 만난 한 택시운전사에게 국회의사당 근처로 태워달라고 하자 “요즘 성난 국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를 하고 있어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국회의사당 인근 고급 커피숍의 테라스에서는 늘 볼 수 있던 정치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스 노동복지부 건물도 둑이 터진 벌판처럼 황량해 보였다. 노동복지부의 아르테미 데툴리 사무총장은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리스의 경제위기가 언제 끝날지 나 역시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테네=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 ▼ 좌우파 ‘票퓰리즘’ 거품만 키워… 책임은 공짜에 취한 국민에게도 ▼
지난해 3월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회담을 앞두고 “그리스가 유럽연합(EU)의 재정 지원을 받고 싶다면 대신 섬과 유적, 미술품을 팔아야 한다”는 얘기가 독일에서 나왔다. 서유럽 국민들이 그리스 위기를 얼마나 싸늘한 시선으로 보는지, 재정위기의 원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리스가 EU의 ‘문제 국가’가 된 책임을 특정 정당이나 정파의 잘못으로 돌리기는 쉽지 않다. 좌우파 모두 재정 상태는 돌아보지 않고 복지 혜택을 한껏 늘린 포퓰리즘 정책을 경쟁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다. 국민들도 이런 정책에 익숙해져 개혁을 거부했다. 그리스에서는 1975년 군부 독재가 끝나고 민주화가 시작된 뒤에도 정당이 이익집단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각종 산업 및 농업보조금이나 임금 인상, 고용보호책을 남발하는 일이 그치지 않았다.
특히 정치인들이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를 득표 전략으로 활용한 뒤부터 공공부문이 지나치게 비대해졌고 연고주의 등 비효율이나 부패지수도 심각한 수준으로 올라갔다. 1980년대 집권한 좌파 사회당은 아예 공무원노조와 노동총연맹 지도부를 당에 포섭하는 전략을 추구했으며, 1990년대 중반 들어 약진한 우파 신민주당도 개혁은 안중에 없었다. 오히려 좌우파 정당 간 득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연금개혁이나 노동시장 개혁 등 개혁 과제는 뒤로 밀려났다.
정치 리더십이 허약해 재무성이 각 부처의 과도한 예산 요구를 억제할 힘이 없었던 것도 재정이 악화된 요인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그리스는 유로존 가입으로 인한 효과와 주력 산업인 관광·해운업이 세계 경제 호황으로 잘 풀린 덕에 개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거품 경제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국가 부도 위기에 빠진 뒤에야 사회당 정부가 ‘전(前) 정부가 심각한 재정적자를 감춰 왔다’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뒤늦은 재정긴축에 나섰지만 개혁에 성공할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지난해에만 양대 노총이 동시 파업을 7차례 벌였을 정도로 개혁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고, 사회당 정부 스스로도 IMF에 대한 민족주의적 감정을 부채질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그리스가 스스로 경제와 복지를 개혁할 역량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해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본 그리스 재정위기’ 보고서에서 “과거 포퓰리즘 정치의 수혜 집단들이 일제히 개혁에 저항하면 그리스 정부 내 개혁 주도 세력은 오히려 힘이 빠져 소수로 전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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