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이 하는 일, 주변 냉소 의식해 ‘남몰래 기부’하지만…
오른손이 알게,“함께 나눕시다” 퍼뜨리면 모두가 행복
석봉토스트의 김석봉 대표(54). 1997년 생활고에 쫓겨 무작정 길거리에서 스낵카를 장만해 토스트 장사를 시작했다. 호텔 조리사복을 구해 입고, 청결에 힘을 쓰며, 고객이 원하는 맛을 찾아 하루하루 노하우를 쌓고 최선을 다한 결과 지금은 전국에 가맹점 300여 개를 갖춘 토스트체인점 본사 대표가 됐다. 부자가 된 그는 “장사를 시작하고 먹고살 만해지면서부터 ‘번 것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가맹점 계약을 맺으려는 가맹점주들에게는 2000만 원 상당의 노하우비, 가맹비, 인테리어 공사비를 받지 않고 무료로 계약을 하고 있다. 그는 또 그동안 40여 곳의 장애인복지관, 노인정, 노숙자쉼터 등을 찾아서 특강과 토스트 봉사를 해 왔다.
여행사업으로 성공한 송경애 여행전문그룹 BT&I 대표(50)는 연말이 되면 직원들과 함께 경기 광주시에 있는 한 장애인수용시설을 찾아 봉사활동을 해 왔다. “쉰 살이 되면 복지재단을 만들어 사회봉사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기업을 운영하다 보니 쉽지 않았다”는 그는 지난해 2월 고액 기부 모임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하고 1억 원을 기부했다. 송 대표는 “한 손은 나 자신을 돕는 손이고,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라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다른 한 손을 양보하는 분들이 주변에 더욱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부자의 자격, ‘리셰스 오블리주’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가 기부활동의 화두였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사회 지도층의 비리와 잡음으로 한국 사회의 사회 지도층은 그 권위를 되찾기가 어려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지적이 많다. 회사원 조모 씨(43·서울 강서구 염창동)는 “딸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딸에게 편법을 가르쳐야 하는지 고민스러울 정도”라고 혀를 찼다.
그래도 여전히 희망은 있다. 일부 지도층의 잘못으로 이미지가 나빠진 사회 지도층을 대신해 김석봉, 송경애 대표처럼 노력과 실력으로 부를 쌓은 부자들이 ‘부자의 책임’인 ‘리셰스 오블리주(Richesse Oblige)’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가난하거나 어려웠던 시절을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극복하고, 고생스럽게 쌓은 자신의 부(富)를 아낌없이 사회에 돌려주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지도층에 실망해온 국민의 시선은 이들의 순수한 발걸음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 부자를 향한 잘못된 시선들
익명을 요구한 K 씨(83). 그는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거쳐 6·25전쟁에 참전한 뒤 무일푼 상태에서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고 살아오던 중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내가 여든이었다”는 그는 “여생을 어떻게 보람 있게 보낼지 고민하다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 결정 때문에 삶이 피곤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한 대학교에 거액의 장학금을 전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에게 “나도 좀 나눠 달라”, “어차피 지저분한 방법으로 번 돈 아니냐”는 등의 협박 섞인 전화 요청이 쏟아졌다.
K 씨는 “예전 같으면 웃어넘겼겠지만 나이 들어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다 보니 이런 전화 받기가 너무 괴롭다”며 “앞으로는 숨어서 기부를 하겠다”고 말했다. 송 대표도 “기부 사실이 알려진 뒤 한 교도소 출소자로부터 ‘방을 구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당황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 거액 기부자들에게 존경과 혜택을
한동철 부자학연구학회 회장(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은 “부자들이 편안하게 기부활동을 할 수 있으려면 우리 사회가 부자들에게도 혜택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자들의 기부행위가 ‘몰래 하는 자기만족’일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기부활동을 활성화하려면 그들의 기부행위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제도적으로는 기부금에 대한 세액공제를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세액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고액 기부단체는 회원 수가 불과 50명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아너 소사이어티가 유일하다.
이 때문에 아너 소사이어티를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등 부자 회원 2만 명을 두고 있는 미국의 토크빌 소사이어티처럼 발전시키거나 다른 기부단체에도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해 기부하는 부자 수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토크빌 소사이어티는 전략적으로 기부활동을 장려하는 치밀한 조직”이라며 “기부하는 부자들의 순수성을 따지며 그들을 위축시킬 게 아니라 토크빌 소사이어티처럼 리셰스 오블리주를 더욱 활성화해 서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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