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영국 정부는 대학에 주는 교육보조금을 예년의 47억 파운드에서 12억 파운드로 대폭 깎았다. 지난달 18일 만난 신현방 런던정경대(LSE) 지리환경학과 교수는 “일부 대학에서는 수업료를 인상하거나 교수들과 재계약을 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의 공공사회복지 지출은 1인당 소득 2만 달러시대였던 1996년부터 국내총생산(GDP)의 20% 선을 유지했다. 이는 다른 유럽 국가보다 10%포인트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지난해 재정적자가 GDP의 12%를 넘어서고 ‘남유럽발 재정위기의 다음 타자는 영국’이란 우려가 널리 퍼지자 복지 예산부터 손댈 수밖에 없었다. 보수당 정부는 2015년까지 예산 830억 파운드(약 147조 원)를 감축하겠다고 나섰다.
재정위기에 빠진 나라들이 한번 늘렸던 복지재정을 다시 줄이는 것은 난제 중의 난제다. 재정이 정상화될 때까지 최소 10년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지만 국민에게 ‘10년만 참아 달라’고 설득하기는 어렵다. 취재에 동행한 옥동석 인천대 무역학과 교수는 “아직은 재정이 건전한 한국에서 지금 복지 논쟁이 일어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며 “복지 지출을 늘리기 전에 적정 지출 수준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앞서 위기를 겪은 나라들의 교훈”이라고 말했다. ○ 재정 악화되기 전에 복지 수준 관리
스웨덴이 공공사회복지 지출 수준이 높으면서도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재정이 안정적인 이유는 시의 적절한 복지 개혁으로 재정 악화를 미리 막았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1991∼1993년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자 정부지출의 상한선을 미리 정해 놓았다. 또 고령화비율에 따라 연금지급액을 조정하는 재정관리 대책을 마련해 이를 꾸준히 실행했다.
1989년 스웨덴의 GDP 대비 공공사회복지 지출 비중은 3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각종 수당 감축과 연금개혁에 들어갔던 2000년에 이 비중은 30.7%로 떨어졌다. 요아킴 팔메 스톡홀름 미래연구소장은 “복지지출의 비중은 줄었지만 가족과 고용 창출을 돕는 적극적 노동시장에 대한 투자는 여전히 OECD 평균보다 2∼4배로 높다”며 효율적인 복지재원 배분을 강조했다.
스웨덴은 지출 순위에서 ‘선택과 집중’ 전략을 취했던 것이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스웨덴은 복지지출의 종착점이 분명하기 때문에 투자 효과도 확실한 나라”라며 “한국도 복지 지출의 우선순위를 정해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 국가 재정 악화 땐 개인 저축도 중요
급증하는 재정적자가 GDP의 7.7% 수준에 이른 프랑스는 지난해 연금수령 가능 최소연령 60세를 2011년부터 6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높이기로 했다. 올해만 37억 유로(약 4조1736억 원)의 재정절감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장폴 피투시 파리정치대 교수는 “프랑스는 개인과 기업자산 보유율이 높고 가계 저축률도 17%에 이르러 몇 년 안에 재정 균형을 이룰 것”이라고 낙관했다. 정부 재정이 적자라도 가계가 흑자면 세금도 올릴 수 있고 복지재정 감축의 영향도 줄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는 같은 이유로 “한국의 가계저축률이 3% 안팎이고 가계부채가 GDP 대비 100%를 넘어서는 것은 정부 재정이 건전하더라도 크게 우려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한국에서 교육에 돈을 쓰는 비중이 높은 것은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이므로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 한국 적정 수준 GDP 대비 13.84%
국내외 전문가들은 한국에 대해 “아직 재정위기가 올 가능성이 거의 없는 나라”라고 평가했다. 한국의 공공사회복지 지출은 OECD 평균의 3분의 1 수준으로 낮다. 하지만 지출 증가율은 2000년 이후 7년간 OECD 1위였다. 이 기간 제도권 밖에 있던 사람들이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제도 안으로 들어오는 등 복지제도도 양적인 성장을 했기 때문이다. 옥 교수는 “복지 지출이 가파르게 상승하다 보면 다음 세대에 부담을 미룰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소득 2만 달러 시대를 거친 선진국에 비춰볼 때 한국의 적정 복지 지출 수준은 얼마일까. 지난해 한국의 1인당 명목 GDP는 2만510달러이고 GDP 대비 공공사회복지 지출은 9%가량.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지속가능한 한국형 복지체제’ 연구에 따르면 2만 달러시대 선진국 복지 지출과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을 감안할 때 한국의 적정 공공사회복지 지출 수준은 13.84%였다. 김용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장은 “한국은 복지 지출을 지금보다 4%포인트 늘릴 여력이 있다”며 “이 수준 안에서 지출 증가 속도를 조절하고 최적의 자원을 배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 옥동석 인천대 교수 “한국, 경제성장 → 복지확충 옛방식 바꿔야” ▼
이번 유럽 방문을 통해 복지국가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다듬고 발전시켜온 복지의 기본 원칙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략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나와 내 이웃 어느 누구도 비참하게 생활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기 때문에 복지가 필요하다. 둘째, 복지는 경제 부문에서 경쟁 탓에 일어나는 구조조정을 개인이 적극 수용하도록 돕는다. 셋째, 높은 세금과 복지 지출을 위해서는 정치와 정부, 그리고 개인들 사이에 신뢰 수준이 높아야 한다. 넷째, 복지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들을 인정하고 묶어내는 민주적 합의와 절차가 필요하다.
서구 복지국가도 초기에는 복지정책의 목적을 완전 고용과 소득불평등 개선에 두었기 때문에 제도의 효율성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 개인 간의 민주적 합의보다는 적대적 투쟁에 주력함으로써 정부의 강제력에 의존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오랜 복지 경험을 거치면서 이들은 좀 더 세련된 원칙을 발전시켜 안정적 복지제도가 뿌리내릴 수 있었다.
서구의 복지제도 변천이 한국에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국가가 특정 산업, 기업, 일자리, 지역이 아닌 바로 개인을 보호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한국 정부가 무너지는 기업을 지원함으로써 개인을 보호해온 것과는 다른 전략이다. 물론 개발 국가 시기에는 정부가 특정 산업, 기업을 지원해 경제성장을 이룸으로써 개인을 보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 아래서는 이런 전략은 외부 변화에 대한 유연한 적응을 막는다. 정부는 개인을 보호하되 개인들의 집합체인 기업, 산업, 지역에는 경쟁과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가 경제를 성장시키는 동시에 복지를 지속 가능하게 한다.
▼ “英 실업수당 개혁, 방향 맞지만 부작용 우려도” ▼ 이언 고흐 런던정경大 교수 현지 전문가 인터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복지 재정을 줄이고 있습니다만 장기적으론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난달 18일 만난 이언 고흐 영국 런던정경대(LSE) 교수(사진)는 “영국의 재정적자는 복지 재정의 확대가 아닌 구제금융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영국은 자유주의형 복지제도를 채택해 북유럽 국가보다 복지 지출이 높지 않은 편이다. 공공사회복지 지출도 GDP 대비 21.3%로, 프랑스(29%) 스웨덴(29.4%)보다 낮다.
그런데도 경제가 나쁘면 복지에 들어가는 지출을 가장 먼저 줄인다는 게 고흐 교수의 얘기였다. 영국은 지금 육아수당 수혜자를 줄이고 실업수당 총액도 제한하는 등 고강도 복지 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그는 이번 개혁의 배경을 “실업수당 개혁은 근로에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업수당이 임금 소득보다 크지 않게 조정해 실업자가 일자리를 구해도 손해 보지 않고, 일하는 근로자들도 ‘근로의욕’이 꺾이는 일이 없도록 했다는 것.
그러나 고흐 교수는 “이번 개혁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지켜봐야 안다”고 조심스러운 전망을 내놓았다. 근로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이 빈곤을 심화하고 노동력의 질을 낮출 수도 있다는 지적이었다.
최근 영국 정부는 스웨덴식 복지 모델을 부분적으로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스웨덴은 완전고용으로 복지 재원을 마련하고 경쟁력을 키웠다”며 “영국 정부도 아동복지 및 고용정책에 투자를 늘려 양질의 노동력을 키우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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