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구에 이르는 익사체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레일 위를 달리던 기차들이 통째로 실종됐다. 도로와 철도는 물론이고 수도 전기 등도 모두 끊겼다. 통신마저 두절돼 가족들의 생사 확인이 안 되는 시민들은 애타는 심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이런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한 노인이 바다 위에서 40여 시간 만에 구조되는 등 기적 같은 생환 스토리가 잇따랐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12일 오전 도쿄를 떠나 자동차로 9시간을 달린 끝에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가 난 후쿠시마(福島)에 도착했다. 진앙에 가까운 북쪽으로 갈수록 공포의 강도는 거세졌다. 식료품이 동난 편의점, 휘발유가 바닥난 주유소, 방이 없는 호텔…. 동북부 지방의 도시 기능은 완전히 마비됐다. ○ 익사체 대거 발견, 인프라 붕괴
쓰나미의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동북부 지역 해안가에선 익사체가 대거 발견되고 있다. 일본 경찰은 13일 미야기(宮城) 현 해안에서 시신 200구를 발견해 수습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틀 전인 11일 밤에는 센다이(仙臺) 시 아라하마(荒濱)에서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 200∼300구가 한꺼번에 발견됐다.
수도와 전기 등 공공서비스는 공급에 막대한 차질을 빚었고 철도 도로 등 기반시설의 피해도 컸다. 정부는 14일부터 순번제로 미리 결정한 시간에 전력 공급을 중단하는 계획 송전을 하기로 했다. 원자력발전소 가동 중단으로 일본에서 약 300만 가구가 전력 공급이 끊기거나 제한된 상황이다. 최소 140만 가구에는 수도 공급이 끊겼다.
신칸센은 철로 손상 등으로 수도권에서 조에쓰(上越)와 나가노(長野)를 연결하는 구간의 운행이 중단됐다. 지진 피해가 집중된 곳을 중심으로 통신 두절 사태가 빈발했고 동북부의 도로 곳곳이 완전히 침수 또는 유실돼 물류도 마비됐다.
통신 두절로 가족의 안부를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상태다. 지진 발생 후 전화 연결이 어렵게 되자 일본의 각 통신사들은 간단히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안전 확인 전언판’을 운영하고 있다. 피해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무사함’ ‘피해를 입었음’ ‘집에 있음’ 등의 짤막한 메시지를 올리면 다른 사람들이 설령 통화는 못해도 이 사람의 전화번호만 조회해 현재 상태를 알 수 있게 하는 서비스다.
한편 미야기 현과 이와테(巖手) 현 해안을 운행하던 열차 4대도 연락이 두절돼 한때 긴장이 고조됐지만 승객들은 모두 안전한 것으로 이후 확인됐다. 이 중 1대는 탈선된 채로 승객 9명이 구조됐다고 일본 언론은 전했다. ○ 기적의 생환도 잇달아
비극 속에서 극적인 구조와 생환 소식도 하나둘씩 전해졌다. 13일 오전 11시 반경 후쿠시마 현에 사는 신카와 히로미치 씨(60)는 후타바 마을 앞 15km 해상에서 표류하다 해상자위대 호위함에 구조됐다. 그는 거대한 쓰레기로 뒤덮인 바다 위에서 쓰나미에 쪼개진 지붕 조각을 타고 버티다 쓰나미 발생 후 40여 시간 만에 구조됐다. 신카와 씨는 11일 지진이 발생했을 당시 자택에서 쓰나미 경보 소식을 듣고 부인과 함께 고지대로 피신하던 중 집에 두고 온 물건이 생각나 혼자 되돌아갔다가 집을 부숴버린 쓰나미에 휩쓸렸다. 그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데 왼손에 작은 상처를 입은 것 이외에는 건강하고 구조될 당시 의식도 뚜렷했다.
미야기 현 센다이 시 미야기노(宮城野) 구의 건축현장에서 일하던 트럭운전사 기쿠치 데쓰야 씨(37)는 쓰나미가 닥친 11일 현장의 조립식 주택에 갇혀 떠내려가다가 겨우 살아났다. 기쿠치 씨가 있던 플라스틱 조립식주택은 현장에서 1km 떨어진 곳까지 쓰나미에 쓸려 내려갔다. 바닷물이 주택 안으로 슬슬 들어오더니 결국에는 턱 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기쿠치 씨는 머리로 조립식 주택 천장을 밀어붙여 겨우 숨쉴 공간을 마련하면서 버텼다. 쓰레기와 소형자동차가 주택을 쳐댔다. 기쿠치 씨는 쓰나미가 좀 약해지고 주택 내 물이 빠지면서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기쿠치 씨는 “정말로 ‘죽느냐 사느냐’였다”고 한숨을 쉬었다.
미야기 현에서는 한 미완성 선박이 15시간을 표류하다가 12일 구조 헬기에 발견됐다. 배에 타고 있던 선박 근로자 81명도 전원 구조됐다. 이 지역 한 조선 업체가 건조 중이던 이 선박은 전날 10m 높이 쓰나미에 휩쓸려 먼 바다로 떠밀려갔다. ○ ‘유령 도시’로 변한 관광지
쓰나미는 일본의 대표적인 미항인 홋카이도의 관문 하코다테도 덮쳤다. 이곳에 도달한 쓰나미의 높이는 2m로 다른 곳보다는 낮았지만, 도시 곳곳은 컨테이너 박스들과 나무 상자들이 뒹굴었다. 도로는 피난길에 오른 차로 꽉 막혔다. 유럽 건축물과 일본식 주택이 어우러져 동서양의 조화를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주민 3만 명이 일제히 빠져나가면서 졸지에 유령도시가 됐다. 시내의 명물인 케이블카와 열차마저 운행이 중단돼 차가 없는 사람들은 걸어서 대피해야 했다.
대지진은 벚꽃 철을 맞아 여행 성수기를 맞았던 일본 관광산업 전체에도 쓰나미를 몰고 왔다. 일본을 여행 중이던 관광객들이 황급히 귀국길에 올랐고 세계 각국에서 일본 여행 상품 환불 사태가 벌어져 여행사들에 비상이 걸렸다. 일본 관광명소들도 속속 영업을 중지하고 있다. 쓰나미로 일부가 침수된 도쿄 디즈니랜드는 즉시 휴관을 선포한 뒤 21일을 영업 재개 목표일로 삼고 안전 점검에 착수했다. 도쿄 만의 인공섬 오다이바도 지진으로 화재가 발생해 검은 연기 속에 묻혔다. 야간이면 황홀한 불을 밝혔던 도쿄타워와 레인보브리지, 오사카 번화가 도톤보리의 명물 간판 구리코 등 일본의 대표적 상징물과 명소들은 전력 절감을 위해 조명을 끄기로 했다. ○ 도쿄에서 후쿠시마까지의 9시간
도쿄를 떠나 동북부로 향하는 국도는 일반 차량 운행이 통제됐다. 취재차량과 구호트럭만이 국도를 이용할 수 있었다. 라디오에선 “후쿠시마 원전 폭발로 방사성 물질이 흘러나왔다. 폭발지역 20km 밖으로 피하라”는 긴급 안내 방송이 되풀이됐다. 북쪽으로 다가갈수록 도로는 곳곳에 균열과 굴곡으로 파여 있었다. 자위대 병력을 태운 트럭들이 텅 빈 도로를 줄지어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도치기 현 북쪽을 지날 무렵 취재차량의 휘발유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주유소마다 기름이 없었다.
도쿄를 출발한 지 9시간 만에 원전 폭발 지역에서 60km 떨어진 후쿠시마 서부에 도착했다. 먹을 것을 구입하려고 한 편의점에 들렀지만 식료품은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편의점 직원들은 직접 100엔짜리 주먹밥까지 만들었지만 이 역시 모두 동났다. 후쿠시마에는 호텔 방이 없거나 영업을 중단했다. 취재팀은 결국 피난민 300명이 머물고 있는 후쿠시마 시청에 양해를 구해 이곳 로비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아이 울음소리와 노인의 기침소리, 시시각각 지진 피해상황을 전하는 TV 속보가 반복됐다. 시청 건물은 새벽녘까지 여진으로 흔들렸다.
후쿠시마=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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