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 부근 해저에서 규모 9.0의 강진이 발생했다. 지진은 쓰나미를 동반해 진앙 주변 해안가를 덮쳤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선 크고 작은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이후 방사능 유출과 관련된 공포가 일본 전역을 휘감고 있다.
당연히 주가는 요동쳤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일부 지진 반사이익 업종은 상승세가 일어났다. 대신 엔터테인먼트 관련주는 처참하게 급락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룹 ‘카라’
이제 막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한 제2차 한류, '신한류'가 일본에 상륙한 시점이다. 한국보다 최소 10배 이상 크다는 일본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터라 기대가 대단했다. 일본진출을 염두에 둔 기획과 전략도 풍부했다.
그런데 막상 한류를 사줄 아시아 최대시장에서 이 같은 재앙이 일어난 것이다. 한류 기대도 일시적으로나마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이현정 SK증권 애널리스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단기적으로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투자심리가 악화될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트렌드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시적"이라고 진단했다. 결국은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결국은 돌아온다'는 식으로 진단할 만 한 건 못될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 크게 돌아올 수도 있다. 케인즈 경제학을 창시한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경기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심리"라고 했다. 월스트리트의 전설적 투자가인 앙드레 코스톨라니 역시 "시장의 90%는 심리학이 지배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같은 시장참여자 심리를 객관적으로 드러내주는 지표가 바로 소비자심리지수다. 그런데 소비자심리지수는 오히려 국가적 재난을 맞이하고 난 뒤 뛰어오르는 경향을 보이곤 한다. 재앙을 만나 함께 고난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국민적 단합이 이뤄지고 그 과정에서 긍정적 소비욕구가 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즈(FT) 역시 13일자 보도에서 "1995년 고베 지진은 일본 경제성장률의 2.5%에 해당하는 10조엔의 재산피해를 남기고 일본 주식시장에 큰 타격을 줬지만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로도 작용했다"고 짚었다.
이런 경향은 물론 대중문화시장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실제로 1995년 1월 한신대지진(고베 대지진)이 발발하고 난 뒤에도 일본 대중 문화시장은 탄탄하게 움직였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왕성해진 경향까지 보였다.
특히 대중 음악시장에서 향상세가 짙었다. 1995년은 일본 대중 음악 사상 최초로 200만 장 이상 판매된 앨범이 3장이나 등장한 해가 됐다. 150만 장 이상 판매된 싱글도 10장을 기록했다.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대기록이다.
한 마디로, 대재앙을 겪었다 해서 시장 위축을 염려할 상황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 점만큼은 안심해도 좋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재난과 관련된 인간심리 자체를 제대로 한 번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제2차 한류 전략의 점검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거니와, 대중문화의 근본적 역할론 측면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대중문화란 결국 인간심리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불난 곳'을 꺼주는 역할이다. 사회현상에 따라 대중의 갈증과 욕구가 발생하고 있을 때 이를 해소해주는 역할이다.
결국은 인간을 위로하고 기운 나게 만들어주는 게 바로 문화다. 그 역할에 충실하려면 일단 전략적 방안도 연구해야 한다. 이에 인류의 대참사를 놓고 상혼(商魂)에 젖어있다 비판해선 안 된다. 아무 생각 없이 가만있는 게 오히려 대중문화계로서 직무유기다.
이 같은 전제 하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볼 부분은 뭘까. 과연 재난을 맞이한 국가의 대중은 어떤 문화상품을 소비하고 싶어 할 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를 알려면 일본이라는 특정지역에서 마땅한 데이터를 찾아야 한다. 1995년의 한신대지진 사례는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물론 한신대지진과 도호쿠대지진은 서로 다르다. 규모와 피해 면에서 배 이상의 차이를 보인다. 거기다 지금은 원전 상황 등을 끼고 있다. 대중심리의 요동도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또 한신과 도호쿠 사이에는 16년의 갭이 있다. 대중문화상품 주 소비계층을 두어 번 이상 세대교체 시킨 상황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신대지진 상황은 참고해볼 만하다. 일본인의 기본 소비심리 구조 정도는 가늠해 볼만한 데이터가 맞기 때문이다. 세대별 감수성은 물론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민족적 감수성의 굵은 뿌리는 10~20년 정도로 흔들리진 않는다.
일단 TV드라마 장르부터 들어가 보기로 하자. 먼저 한신대지진은 1월 17일 발생한 재난이니 모든 분기를 전부 계산에 넣을 필요가 있다.
1995년의 TV드라마계는 시청률 면에서 그 전년도에 비해 두드러지는 부분은 딱히 없었다. 대신 '분위기'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내용의 드라마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평균시청률 20%대를 넘어선 5편의 드라마 모두 어두운 내용이었다. 사회파적 분위기도 짙었다. 5편을 살펴보자.
히트작 속편 '집 없는 아이 2'는 학원물이었음에도 교내 왕따, 근친상간, 감금, 각종 가정폭력이 넘실댔다. 노지마 신지 각본 '미성년' 역시 같은 청춘물이어도 노지마 특유의 어두운 색채가 역력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귀가 들리지 않는 화가와 극단 연습생 간 무거운 사랑 이야기였다. 기무라 타쿠야 초기작 '인생은 최고다'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청년과 복싱선수 출신 중년 사채업자 사이 묵직한 우정 이야기였다. 심지어 아이돌스타 마츠모토 준이 출연한 만화 원작 '김전일 소년의 사건부'마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는 매화 잔혹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의 드라마였다.
결국 암울한 사회분위기를 반영해주는 드라마들이 인기를 얻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상황이다. 당시는 1990년 터진 경제 버블에 자연재해가 추가로 일어난 상황이었다. 대중정서가 이전과 같을 리 없었다. 그리고 위 드라마들은 그런 대중정서와 맞아 떨어졌다.
한편 영화 장르 쪽도 시장 파이는 전년도 대비 큰 차이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시장 분위기도 전년도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대중의 콘텐츠 선택 면에서 1990년대의 전반적 흐름을 그대로 반영한 해였다.
큰 특징은 없다.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이 1위를 차지했다. '고지라' '남자는 괴로워요' '도라에몽' 등 프랜차이즈가 여전히 성공을 거뒀다.
이 이변을 지목하자면 영화 장르 역시 TV드라마와 코드는 같았다는 점을 수 있다. 다소 무거운 분위기의 영화들이 좋은 성과를 보였다. 태평양전쟁 당시 학도병들의 비극을 다룬 '들려, 우리들의 목소리'가 약 10억1000만엔을 벌어들였다.
한 여성의 지난한 일대기를 그린 사극 '장(藏)'도 10억엔을 돌파했다. 둘 다 배급수익 기준이니 지금의 흥행수익 기준으로는 20억~25억엔 정도를 범 셈이다. 별달리 흥행요소가 없었던 무거운 소재 영화들치곤 이변이었다. TV드라마나 영화나 같은 극예술 장르여서 비슷한 경향이 일어났다고 봐야한다.
이제 제2차 한류 중심인 대중음악 쪽을 살펴보자. 언급했듯 1995년은 대중음악시장이 크게 활성화된 해였다. 그리고 1995년의 특징은 이른바 '위로해주는 노래'들이 큰 인기를 얻었다는 점이다.
드림스 컴 트루의 따스한 발라드곡 '러브 러브 러브'가 무려 235만 장을 판매하는 쾌거를 거뒀다. 신예 오카모토 마요의 데뷔곡 '투모로우'도 166만 장 이상을 팔아치웠다. 경쾌한 리듬에 희망적인 가사를 붙인 노래다.
한편 긍정적 영단어인 '헬로'와 '투모로우'가 제목에 들어간 노래들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각 단어마다 2곡씩, 4곡이 히트곡 대열에 올랐다. 그것도 150~200만 장대의 대히트였다.
한편 앨범 판매에 있어서는 더욱 흥미로운 사건이 1995년 일어났다. 미국 팝가수 머라이어 캐리의 음반 '데이 드림'이 무려 150만 장 이상 판매된 것이다. 연간 통산 베스트 당당 7위에 랭크됐다.
해외 가수의 해외 음반이 100만 장 이상을 판매한 건 1990년대 들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장장 7년 동안 머라이어 캐리는 연간 베스트 10에 진입한 마지막 해외 뮤지션으로 남았다.
이 같은 현상은 1995년 당시에는 뭐라 해석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은 '여성이 동경하는 실력파 여성 뮤지션'에 대한 요구가 발현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곧바로 아무로 나미에, 하마사키 아유미, 우타다 히카루 등 이른바 '우타히메(歌姬)'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다들 실력파 뮤지션들이었으며 여성층의 지지가 두터웠다. 머라이어 캐리 경우는 이 같은 새 경향의 전초전 격 케이스 정도로 해석됐다.
물론 여기서 한신대지진과의 직접적 연관성을 찾아보기란 어렵긴 하다. 그러나 경제난 등에 여성층의 대중문화상품 소비는 외려 두드러진다는 공식은 있다. 이 공식에 적용시켜 볼 수는 있다. 따지고 보면 지난해 한국 여성아이돌그룹 열풍 역시 배경은 비슷했다.
국가적 재정적자와 청년층 구직난 등이 한껏 고조되던 시기에 여성층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현상이었다. 일본여성층은 고난의 시기에 대중문화 향유를 통해 삶의 고단함을 해소하려는 경향이 짙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룹 ‘소녀시대’
이상의 분석으로 볼 때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는 도호쿠대지진 이후 일본 대중문화시장에서도 큰 무리 없이 활약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다. 실력파 여성아이돌그룹을 중심으로 한 한류 전략도 딱히 수정할 필요가 없다.
전반적 방향성 면에서 1995년 당시 일어난 경향과 다른 부분이 없다. 한편 '위로해주는 노래' 특수는 본래 해외 뮤지션으로선 얻기 힘든 것이라 신경 쓸 게 못 된다. 그런 노래는 본래 자국민이 자국어로 능숙하게 소화해줘야 효과가 난다. 그러니 그리로 방향을 새로 잡아야 할 필요성은 희박하다.
TV드라마 시장도 마찬가지다. 사회파적 분위기의 어두운 드라마들은 자국 내 상황이 묘사되고 그 정서가 반영돼야 효과를 낸다. 한국 콘텐츠가 들어설 만한 상황이 아니다.
다만 아이돌 출연 드라마들이나 젊은 층 대상 드라마들은 지난해와 상황이 크게 다를 것이 없을 듯싶다. 조금씩 그 시장을 확대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시장 파이 자체가 줄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편 영화는 본래 한류 열풍에서 비껴가 있는 장르니 딱히 더 생각해볼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아이돌 출연 영화들 정도는 제2차 아이돌 한류에 힘입어 동반상승 효과를 낼 수는 있다.
대표적인 한류스타 배용준. 이렇듯 큰 부담감 없이 진행될 것으로 보이는 게 2011년, 도호쿠대지진 이후 일본대중문화시장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에 기대를 더 걸어볼 만한 상황이 겹쳤다. 도호쿠대지진을 맞아 한국 대중문화산업은 '처신'을 참 잘했기 때문이다. 한류 연예인들 중심으로 거액의 기부 릴레이를 벌인 처신이다.
이는 일본 대중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본은 본래 기부문화가 발달되지 않은 환경이다. 다른 이에게 도움을 받는 등 폐 끼치는 걸 무척이나 꺼려하는 분위기다. 그러다보니 자연 도움을 주는 것도 어색해한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분위기가 짙다. 그래서 일본연예인들은 재난상황이 와도 팬들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벌이는 정도로만 활약한다. 자기 돈은 잘 안 낸다. 혹 자기가 기부하더라도 아주 많지는 않은 액수가 결정되곤 한다. 그런데 한국연예인들은 선뜻 거액의 기부금을 차례로 척척 내놓으니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최소한 외국인들이 일본서 돈 벌어 자기 나라로 가져간다는 식 거부감은 상당부분 줄었다. 대신 번만큼 번 곳에 다시 환원한다는 이미지가 한국연예인들에 부여됐다. 혐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기존 한류 팬층은 더욱 고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미래가 밝다.
끝으로, 위와 같은 시장 환경이 일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어느 나라건 크나큰 재난을 맞으면 대개 다 비슷하지 않겠느냐는 의문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국가적으로 큰 충격이나 고난이 닥치면 대부분 대중은 그걸 잊어버리려는 경향이 강하다.
같은 아시아국가인 한국과 홍콩 예를 들어보자. 한국의 IMF 외환위기, 홍콩의 중국반환 등 상황에서 한국과 홍콩은 모두 가벼운 극예술 콘텐츠를 미친 듯이 소비했다. 한국에선 불황 여파가 짙어질수록 코미디 소비가 늘어 마침내 조폭 코미디 일대 붐을 일으켰다. 홍콩도 반환이 가까워질수록 주성치 코미디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대중음악소비도 딱히 위로를 주는 노래들이 히트하진 않았다. 대신 강렬한 비트의 노래들이 히트했다. 일본과는 판이하게 다른 구도였다.
일본은 여러모로 특이한 시장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일본시장에서 계속 활약하고 싶다면 일본과 일본인을 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대지진과 같은 재난상황에서도 우리와 다르게 반응하는 시장 환경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고난을 겪고 있는 일본 대중, 그리고 그런 일본 대중에 다가서고자 하는 한국 대중문화산업 모두의 승리와 건투를 빈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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