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장막극은 드라마틱하지 않다. 극적인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난다 해도 그 사건이 다 지나간 뒤 씁쓸한 후일담으로 전해질 뿐이다. 등장인물 중에 괴짜는 있어도 영웅이나 악당은 없다. 대부분 끊임없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신세타령을 늘어놓지만 결코 행동하는 법이 없는 일상인이다. 체호프가 일상을 무대에 끌어올린 현대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갈매기’는 그 4대 장막극의 서두를 장식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똑같이 일상을 극화한 작품이란 오해를 많이 받는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가출과 자살이라는 극적 사건이 숨어있다. 또 사랑과 꿈이라는 불꽃에 몸을 던지는 젊은 남녀가 극을 끌고 간다. 그런 점에서 4대 장막극 중에서 가장 젊고 드라마틱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갈매기’는 러시아에서 초연되고 60년 뒤인 1966년 명동예술극장(옛 국립극장)에서 고 지촌 이진순의 연출로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올해 그 45주년을 맞아 같은 극장에서 지촌에게 헌정되는 ‘갈매기’가 공연되고 있다.
러시아 연출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는 이 작품을 처절한 비극으로 그려내면서 자신의 연기법과 연출법을 확립했다. 하지만 정작 체호프는 “왜 코미디를 비극으로 끌고 가느냐”며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체호프가 자신의 장막극을 희극으로 규정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불평불만만 늘어놓을 뿐 정작 그것을 바꾸기 위해 진지한 고민도, 과감한 행동도 보여주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어리석음’을 눈앞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둘째는 작가의 자기풍자다. 의사 출신의 작가였던 그는 의사나 작가를 등장시켜 끊임없이 자신의 예술관이나 철학관을 조롱하고 희화화한다. 문제는 전통적 연출가의 눈에는 첫 번째 이유가 잘 보이지 않고, 현대의 관객에겐 두 번째 이유가 잘 먹힐 수 없다는 점이다.
이번 작품을 연출한 김석만 씨는 1막에선 희극성을 부각하는 대신 2막에선 비극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이를 돌파한다. ‘갈매기’에는 3중 4중의 삼각관계가 얽혀 있다. 작가 지망생인 트레플레프(김수현)와 여배우를 꿈꾸는 니나(한선영), 트레플레프의 어머니이자 유명배우인 아르카지나(김금지·서주희)와 그의 연하 애인으로 니나를 유혹하는 유명 작가 트리고린(송승환·박지일), 트레플레프를 짝사랑하는 마샤(김소진)와 마샤를 짝사랑하는 가난한 교사 메드베젠코(정우준)….
1막에선 본인 자신을 제외하곤 모두가 아는 이 질투의 역학을 희극적으로 강조한다. 2막에선 저마다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호수 위를 맴도는 갈매기와 같은 인간의 본원적 비극성을 드러낸다.
1막과 2막의 간극은 낭만적 음악과 무대로 채웠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기타로 이뤄진 4인조 실내악단은 공연 중간 중간 음악감독 한정림 씨가 작곡한 서정적 선율로 호숫가에 불어오는 바람처럼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연극 시작 전에 무대 중앙에 띄워놓았던 갈매기 영상을 마지막 장면에 그 호수 너머로 날려 보내는 신선희 씨의 무대도 이를 돕는다.
관객은 이렇게 낭만적 음악과 무대를 징검다리 삼아 우스꽝스럽지만 또 한편으론 서글픈 우리네 인생사의 양 단면을 넘나들게 된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체호프의 장막극을 낭만적으로 풀어낸 여유에서 체호프 연극에 대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문제는 그것을 무대 위에서 구체적으로 펼쳐 내야 하는 연기의 밸런스다. 아르카지나 역을 맡은 김금지 씨는 1막에서 스크루볼 코미디에 가까울 정도로 희극적 연기를 펼친 탓에 2막에서 길을 잃었다. 니나 역을 맡은 한선영 씨는 1막의 청순한 니나와 2막의 회한에 가득 찬 니나를 한꺼번에 담아내기엔 좀 더 담금질이 필요해 보였다.
반면 아르카지나 역을 김금지 씨와 나눠 맡은 서주희 씨는 자신의 욕망에 눈이 먼 중년여성의 희극성과 그로 인해 아들을 잃게 되는 어머니의 아픔을 균형 있게 표현했다.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마샤 역의 김소진 씨였다. 짝사랑의 가시에 찔린 고통을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희극과 입술을 깨무는 비극으로 우아하게 버무려내 가장 존재감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i:2만∼5만 원. 5월 8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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