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남자의 의리에 가려진 허위의 가면을 벗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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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19일 03시 00분


◇연극 ‘속살’
연기★★★★ 대본★★★☆ 연출★★★☆ 무대★★★

연극 ‘속살’의 배우들은 뚜렷한 개성으로 극에 생동감과 사실감을 더한다. 왼쪽부터 배우 이재
수(영석), 김태균(상필), 김주헌(형기), 김범석 씨(경식). 극단 골목길 제공
연극 ‘속살’의 배우들은 뚜렷한 개성으로 극에 생동감과 사실감을 더한다. 왼쪽부터 배우 이재 수(영석), 김태균(상필), 김주헌(형기), 김범석 씨(경식). 극단 골목길 제공
암전(暗轉) 때마다 객석 여기저기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관객들은 미동도 없이 몰입하다가 불이 꺼지면 비로소 자세를 고쳐 잡으며 굳었던 몸을 풀었다. 그럴 만큼 연극 ‘속살’은 흡인력이 뛰어났다. 배우들의 사실적이면서 선 굵은 연기 덕분이다.

여러 명의 배우가 하나의 작품에서 제각각 존재감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작품에선 주인공인 네 명의 친구 상필(김태균) 경식(김범석) 형기(김주헌) 영석(이재수)뿐만 아니라 상필의 고교 후배인 만년 고시생 안경(이호열), 경식의 부인 경진(김동희), 상필의 동생인 상준(황선택)까지 모두 한껏 뚜렷한 개성을 뿜어낸다. 극단 골목길의 박근형 대표는 배우의 잠재력을 120% 끌어낸다는 평판을 받아왔는데 이 극단 연출부 소속으로 이 작품의 극작과 연출을 맡은 연출가 이은준 씨도 박 대표의 이런 능력을 물려받은 듯하다.

고교 시절부터 단짝인 네 친구. 그 중심엔 여자들에게 인기 있으면서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순정파 상필이 있다. 하지만 그건 과거고 지금의 상필은 직장도 없이 술독에 빠져 사는 데다 걸핏하면 경식이 운영하는 고깃집에서 사고를 치고 감방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골칫거리다. 경식과 경찰관인 형기, 보험 영업사원 영석은 ‘그놈의 의리’ 때문에 그의 생활비를 대고 사고를 칠 때마다 뒷수습을 하지만 점점 인내심을 잃어간다.

상필은 그런 친구들에게 오히려 큰소리다. 참다못한 형기가 “어쩜 이렇게 거머리처럼 우리 피를 빨아 먹느냐”고 힐난이라도 하면 “너희는 왜 니들이 손해 본 건 기억하면서 니들이 피해 준 건 기억 못하냐”고 면박을 준다. 거기엔 그들만이 간직한 과거의 ‘비밀’이 숨어 있다.

이 작품으로 연출 데뷔한 이은준 씨는 여성이지만 남자들이 흔히 여자들과의 차별성을 주장할 때마다 내세우는 ‘남자들만의 의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자신감을 보여준다. 의리라는 것이 얼마나 부서지기 쉽고 허위의 가면을 쓰고 있는지를 그는 극을 통해 망치로 내리치듯 부수고, 부서진 파편까지 집요하게 밟아댄다. 우정이라는 허울 아래 영혼의 속살을 감추고 살아가고 있는 게 수컷들 아니냐고 꼬집는다. 이를 통해 과거엔 순수했지만 점점 이기적으로 바뀌고 인간관계도 피상적으로 변해가는 현대사회를 비판한다. 등장인물들의 어린 시절 꿈을 극에서 공들여 보여주는 것도 그런 이유다.

하지만 상필이 친구들을 위해 희생한 사건을 너무 극단적으로 설정하는 바람에 ‘상필=착한 놈’ ‘다른 친구들=나쁜 놈’의 흑백구도로 비치는 점이 아쉽다. 또 상필이 극 마지막에 영혼으로 등장해 작품의 주제를 다시 요약하는 듯 얘기하는 것은 관객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뺏는 사족으로 느껴졌다.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i:1만5000∼2만 원.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정보소극장. 02-6012-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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