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전 국민권익위원회 간부회의는 마치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한 분위기였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이달 초 권익위 간부가 만취한 여직원을 성폭행한 사실이 경찰 수사로 드러났다는 뉴스가 조간신문에 일제히 보도된 직후였다. 인터넷에는 “국민강간위원회로 문패를 바꿔 달아라”라는 비아냥거림이 쏟아졌다.
김영란 국민권익위원장은 대책을 논의한 이 자리에서 “당분간 자숙의 시간을 갖자”고 당부했다. 하지만 몇 시간 뒤 권익위는 마치 사건을 무마하기라도 하려는 듯 갑자기 ‘권익위 간부들, 한국의 반부패 정책 홍보 절호의 기회를 위해 맹활약’이라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입장이나 향후 대응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는 홍보자료였다. 이에 대한 질타가 이어지면서 권익위는 또다시 부랴부랴 뒷수습에 나서야 했다.
김 위원장은 이번 사건으로 취임 5개월 만에 혹독한 시련에 부딪히게 됐다. 권익위 수장으로서 부하 직원에 대한 관리감독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데다 첫 여성 대법관 출신으로 여성과 약자의 인권보호에 앞장서 왔다는 평가에 큰 흠집이 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같은 여성을 성폭행한 모텔 종업원은 구속된 반면 권익위 간부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위원장이 대법관 출신이라는 점이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거액의 연봉이 보장되는 로펌행(行)을 마다하고 위원장에 취임한 뒤 ‘전관예우 근절’을 외쳐온 김 위원장에게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김 위원장은 12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책임을 통감한다”며 “모든 것이 제가 부족한 탓”이라고 말했다. 영장 기각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수사 중인 사건에 개입할 수 없다. 종업원의 구속 사실도 어제 오후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강간치상 피의자에 대한 영장 기각이 맞는 결정이라고 보느냐’는 거듭된 질문에는 “사건 당시 정황을 잘 몰라 뭐라 말하기 어렵다”면서도 “판사 시절 이런 사건에는 더 엄격하게 했는데… 정말로 관대하게 넘어가지 않았는데…”라고 한숨을 쉬었다.
이달 초 사건을 보고받은 김 위원장은 격노했다고 한다. 문제의 간부를 곧바로 직위해제하고 수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중앙징계위원회에 회부하라고 지시했다. 또 피해 여성의 신원이 노출되거나 업무에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이날 오후 권익위는 백운현 부위원장이 나서 간부 40여 명에게 공직기강 교육을 실시했다. 조만간 직원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예방 및 윤리 교육도 할 예정이다. 또 직원들에게 사실상의 금주령을 내리고 21일로 예정됐던 가족 동반 체육대회도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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