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일, 순, 세 글자를 유리창에 쓰고는 돌아서 무대 안쪽으로 서서히 걸어갔다. 등 뒤로 막이 내려갔다. 그 너머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막이 다시 오르고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서자 “마마(어머니)” “마마” 하는 연호가 극장을 가득 채웠다. 관객 1000여 명이 모두 일어서 박수를 치며 만들어낸 함성의 합창. 연극생활 40년 만에 처음 경험하는 이 어마어마한 광경에 전율하고 감동했다.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죽을 뻔한 일과 죽은 거나 마찬가지의 일을 곧 겪게 될 줄은. 연극배우 손숙(67)은 정말 몰랐다. 1999년 5월 29일 연극 ‘어머니’ 러시아 첫 공연, 타간카 국립극장, 모스크바였다. 모스크바….
○ 죽음과 대면한 2시간
마음이 급했다. 두 번째 공연도 짜릿하게 마무리한 30일 저녁. 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우겨댔다. 원래는 출연료도 없이 숙식과 항공료만 제공받고 고생한 후배 배우들, 스태프와 하루 이틀 더 머물며 모스크바 관광을 할 참이었다.
‘장관이 장난이냐.’ 그 며칠 전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되자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 어떤 신문의 사설 제목이 다시 떠올랐다. 거기에 예정됐던 모스크바 공연까지 치르겠다고 하자 거의 모든 언론이 ‘장관의 처신이 아니다’라며 질타했던 터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고집을 부려 겨우 싱가포르에서 갈아타고 그 다음 날 서울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옛 소련 문화장관 출신의 극장장이 극장 2층에서 열어 준 축하 리셉션도 대강 분장만 지운 채 인사만 하고 뒤로했다. 황급히 2층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한 열 계단 정도 남았을까. 구두 굽이 어딘가에 걸리는가 싶더니 몸이 붕 떴다. 머리부터 바닥으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여기서 이제 (저승으로) 가는구나 싶었어요.”
본능적으로 왼팔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쿵. 2층 난간에 서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악’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인호 주러시아 대사를 비롯한 사람들이 그를 소파에 눕혔다.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도 “나 가야 돼, 가야 돼”라는 말만 반복했다. 왼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죽어도 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을까.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빨리 가야 한다’며 끊임없이 지껄이더라고 나중에 누군가가 말해줬다. 이 대사가 절대 가지 못한다며 난리를 치고, 공항 의사는 (의사 책임이 아니라는) 각서를 써야 비행기에 탈 수 있다고 엄포를 놨지만 막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무막대를 부러뜨려 만든 부목을 왼팔에 대고 비행기에 올랐다.
“죽더라도 가야겠더라고요. 죽더라도.”
비행기에 올라 좌석에 앉은 것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2시간이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그의 주위로 승무원과 승객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함께 탔던 분장사 후배는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며 펑펑 울고 있었다. 승무원들이 꿈쩍도 않는 그를 보고 ‘기내에 의사가 있느냐’는 방송을 몇 차례 한 뒤였다.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기내 화장실에 들어가서 보니, 아뿔싸…. 몸이 얼마나 놀랐는지 속옷 가득 대변을 봐버렸다. 속옷을 버리고 대충 마무리한 뒤 자리로 돌아왔다. 나중에 의사에게 들으니 그때 그렇게 일을 보지 않았다면 몸에 더 좋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겨우 싱가포르를 경유해 다음 날 새벽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휴….
하지만 손숙은 몰랐다. 전날 공연을 마치고 감동의 도가니가 된 무대에 올라왔던 양복 차림의 세 남성이 자신에게 또 다른 ‘죽음’의 경험을 맛보게 할 줄은. 러시아 국빈방문 중이던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따라온 전국경제인연합회 소속 기업인 10여 명은 이날 예정에 없던 ‘어머니’ 공연을 관람한 뒤 십시일반으로 모았다며 흰 봉투를 무대에서 건넸다. 손 씨는 관객을 향해 “우리 기업인들이 연극과 여러분의 열정에 감동해 금일봉을 줬다”며 극장장과 봉투를 맞잡고 들어 보이며 인사까지 했다. 모스크바에서의 그 마지막 밤은 그에게 한동안 불면의 밤을 선사했다. 죽음과도 같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 세상에 겪지 않을 일은 없다
물잔을 잡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앞줄에 앉은 기자가 분명 자신을 해코지할 의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얄미웠다. ‘저 얼굴에 물을 끼얹을까?’ 참았다. 잔을 다시 내려놨다. 전날이었다. “1만 달러가 아니라 2만 달러였죠,”
장관 된 지 정확히 30일 된 날 밤. 모 신문 기자라며, 손 선생님을 존경한다며, “모스크바 공연 때 1만 달러를 받으셨죠”라며 뜬금없이 전화가 왔다. 거리낄 건 없었다. 모스크바 공연 두 번째 날 받은 금일봉 봉투에는 2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고생한 스태프와 배우 30여 명이 기념품이라도 사가게 200∼300달러를 나눠 주고 나머지는 오랜만에 거나하게 회식이나 하자고 했던 돈이다. 그런데 그게 뇌물이란다. ▼ 손숙의 삶을 바꾼 모스크바 ▼
‘수많은 관객 앞에서 준 돈이 뇌물이라니. 내가 단돈 100달러를 쓴 적도 없는데 뇌물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나였다. 이름이 잘 알려진 여자 배우 장관. 구미가 당기는 재료였다. 그래서 이튿날 청와대에 ‘더는 하지 않겠다’고 통보하고 기자회견을 했다.
관용차를 마다하고 자신의 차로 집에 가는데 김 전 대통령이 전화를 했다. “미안해요. 연극 잘하고 있는 사람 데리고 와서 이런….” 그는 말했다. “하늘을 우러러 잘못한 것 때문에 그만뒀다면 대통령께 미안하지만… 괜찮습니다.” 옷 로비 사건 같은 다른 일로 정신이 없던 청와대가 자신을 옹호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그러고 한두 달은 너무 억울했어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어요. 울화가 치밀어 올랐죠. 벽을 때리기도 했어요.”
그때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선생이 전화를 했다. 빨리 연극하자고 하신다. 죄진 것 없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하신다. 몸을 추슬렀다. 연극을 시작하고 쉬었던 방송을 재개했다.
지금도 모스크바를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울렁댄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그런 ‘울렁’은 아니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스크바에서 겪은 일이 손숙에게 줬던 충격과 이후 한 달 동안의 경험. 그건 그가 이후 다른 인생을 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나 할까.
“그전까지는 연극한다고 건방깨나 떨었던 것 같아요. 연극이 얼마나 감사한지 새삼스레 깨닫는 계기를 만들어줬어요. 만약 장관직에 오래 있었더라면 연극계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아마 정치권 언저리에서 지금도 머물고 있지 않았을까도 싶어요.”
모스크바…. 손숙은 1999년 5월의 그날 계단에서 떨어지면서 한 번 죽었다 살아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남은 인생은 덤으로 사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좀 더 잘 살아야겠다, 겸손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됐다.
얄궂은 질문을 하던, 그러나 아무런 책임도 없는 기자에게 물잔을 던지고 싶었던 그 순간을 참은 손숙에게 이후 한 달가량 가장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은 누구였을까. 바로 어머니, 아니 엄마였다. 바람을 피운 아버지가 데려온 아이들마저 성심성의껏 돌봐주셨던 엄마. 칠순을 얼마 앞둔 손숙 씨의 눈을 빨갛게 만들며 말을 더듬게 만드는 엄마. 저세상 하늘에서 아직도 내려다보는 엄마 때문에 그는 그가 있어야 할 곳, 연극판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엄마,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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