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낮 12시 부산 남구 대연동 부경대 백경(白鯨)회관 앞 벤치. 여느 대학생과 다를 바 없는 옷차림의 리가이 이리나 씨(21)는 재기발랄하고 꿈 많은 대학 1년생의 싱그러움이 넘쳤다. “맞습니더. 제가 이리나입니다.” 억양엔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만 아니면 한국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한국말이 유창했다. ○ 낯선 이국땅
199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이리나 씨는 2003년 난생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열세 살이었다. 어머니 마리나 씨(38)가 재혼하면서 우즈베키스탄 외할머니 집에 홀로 남겨져 있던 그를 호적에 올렸기 때문이다. 고려인 4세인 어머니는 1996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이리나 씨의 부산 생활은 모든 게 서툴고 낯설었다. 어머니는 “배우지 않으면 커서 고생한다”며 한국 고등학교에 진학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자르고, 검은 교복에 비슷한 가방을 든 틀에 박힌 한국 학교 모습이 이상했다. 이런 학교에서 자신을 이방인으로 취급할 것을 생각하니 학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욱이 한글은 너무 어려웠고, 공부도 쉽지 않았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사정도 부담이 됐다.
그는 한국생활에 적응할 겸 맞벌이 부모를 대신해 1년간은 집안일을 도맡았다. 당시 세 살밖에 안 된 동생을 돌보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동생이 어린이집에 들어가자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 부산 사상공단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냉면 생산 공장에서 하루 4∼6시간씩 포장 일을 했다. 어깨 너머로 한국어도 익혔다. 모르는 단어는 메모지에 적어 몇십 번이고 외우고 또 외웠다.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는 새 아버지(45)에게 물었다. 새 혈육이 된 할머니(72)도 그의 한글 선생이었다. 이때 할머니와 이야기하면서 알게 모르게 사투리를 배웠다.
1년간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2005년부터는 부산 사상구 모라동에 있는 영어학원을 다니면서 영어와 한글을 동시에 배웠다. 이때 처지가 비슷한 우크라이나 출신 제니 씨(20)를 만났다. 당시 다문화 대안학교인 부산 남구 문현동 ‘아시아공동체학교’에 다니던 제니 씨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이런 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는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공부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2006년 이 학교에 입학했다. ○ 한국어 따라 잡기
3년간의 독학으로는 한글 공부에 한계가 있었다. 아시아공동체학교에서 초등학교 1, 2학년 교과서로 다시 기초부터 다졌다. 공책에 자음과 모음을 수백 번 썼다. 그때 쓴 노트만 100여 권에 달한다. 오전 9시에 등교해 오후 3시 하교할 때까지 읽기와 쓰기, 듣기, 말하기 등 한글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 당시 어려웠던 ‘ㄱ, ㅋ’, ‘ㄷ, ㅌ’, ‘ㅈ, ㅊ’은 지금도 발음이 잘 되지 않고 구분도 안 된다. ‘바다 배, 먹는 배, 사람 배’와 ‘내리는 눈, 사람 눈’처럼 같은 글자인데 뜻이 다른 동음이의어를 이해하고 외우는 것은 지옥이었다. 하교 후에는 집안일은 물론이고 집 근처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는 아버지 일을 돕는 것도 기본이었다. 하루 일과 중 복습과 예습을 끝내면 다음 날 오전 두 시를 넘기는 것은 예사였다.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루는 울면서 어머니에게 하소연했다. “한국에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할 이유가 뭐냐. 고국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2년간 아시아공동체학교에서 1200여 개 어휘를 외웠고, 반대말과 비슷한말, 존댓말과 예사말, 속담과 고사성어까지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한글을 가르쳤던 이성옥 교사(42)는 “당시 나이가 가장 많았던 이리나는 힘들어도 자신의 처지를 내색 한 번 안 했다”며 “초등생을 가르치거나 자원봉사도 마다하지 않는 등 매사에 적극적이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만 당시 아시아공동체학교는 부산교육청에서 위탁교육기관으로 지정받지 못한 데다 고등학교 과정도 없었다. 학교에서는 대학 진학을 원하는 그에게 부산 금정구 회동동 예원여고를 소개했다. 이 학교에서는 배움의 기회를 놓친 어머니들에게 2년 만에 고등학교 과정을 마칠 수 있는 ‘어머니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
2008년 입학 당시 100여 명의 어머니 학생이 그의 동기생이었다. 이리나 씨는 반에서 유일한 젊은 외국인 학생이었다. 어머니 학생들은 그를 딸처럼 대해줬다. 그도 거리낌 없이 어머니들을 따랐다. ○ 꿈을 향한 도전
부모가 먼저 출근하고 동생을 학교에 보낸 뒤 집안일을 끝내면 오전 11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헐레벌떡 뛰어 오후 1시경 산중턱에 있는 학교에 도착하면 수업이 시작된다. 수업은 오후 6시까지 이어졌고, ‘대학’이란 목표를 향해 분초를 아꼈다. 수학, 과학, 체육은 쉬웠다. 하지만 국어(한글)와 역사, 사회는 쉽지 않았다. 한글은 알면 알수록 더 어려웠다. 긴 문장과 빠른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만 어머니들에게 말뜻을 묻고 사전을 찾아가며 실력을 키웠다.
시험기간뿐만 아니라 어머니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밤샘을 밥 먹듯이 했다. 몇 번 지각을 하자 당시 담임 박순곤 교사(49)가 “나이 많은 어머니들도 그러지 않는데…”라며 타일렀다. 그 후로는 아무리 힘들어도 학교는 늦지 않았다. 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해 수업료의 절반에 해당하는 장학금을 받았다. 나머지 학비를 몰래 내줬던 박현숙 씨(46)에 대한 고마움은 마음의 빚이다. 박 씨는 “이리나의 어른들에 대한 배려나 생각은 요즘 청소년들과는 깊이가 달랐다”며 “한국 사람이 된 데 자긍심을 심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방학도 없이 2년간 갈고 닦은 실력으로 졸업과 동시에 부산대에 진학하려 했다. 그러나 대학에서 원하는 서류가 부족해 그만 지원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고국 우크라이나에서 부쳐온 대학 진학 관련 서류가 미비했던 것. 그는 곧바로 우크라이나로 건너가 관련 서류를 준비해 왔고, 부경대 국제통상학부에 2010학년도 2학기 외국인전형으로 지원해 합격했다.
“국제통상학부에 입학한 것은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역 전문가로, 통역 전문가로 양국의 미래에 기여하고 싶어요.”
삼겹살에 된장국을 좋아하고, 돼지국밥을 좋아하는 스물한 살 여대생. 한 연예인을 좋아했다가 병역 관련 보도를 보고 싫어하게 됐다는 다문화가정 대학 1년생. 4년 뒤를 머릿속에 그리며 신발 끈을 질끈 동여맨 그의 대학생활은 이제 가속도가 붙었다.
“한국이 자기 나라가 아닐지라도 참고 노력하면 길은 있습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자에게 그 길은 반드시 열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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