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권재현의 트랜스크리틱]‘일본판 브로크백마운틴’ 겨울선인장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5월 31일 14시 19분


카우보이 동성애자들의 비극을 그린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왼쪽이 잭 역의 제이크 질레할, 오른쪽은 에니스 역의 히스 레저.
카우보이 동성애자들의 비극을 그린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왼쪽이 잭 역의 제이크 질레할, 오른쪽은 에니스 역의 히스 레저.
게이의 슬픈 초상을 그린 작품 중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2006)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 영화는 미국적 남성의 상징인 카우보이 세계에서 게이로 태어난 두 남자의 비극적 사랑을 다뤄 먹먹한 감동을 줬습니다.

자, 이를 일본 사회에 적용한다면 어떤 집단을 다룰 수 있을까요? 일본 조직폭력배 야쿠자를 떠올리시겠지만 이는 미국의 갱스터와 더 잘 어울리는 조합이겠죠? 일본의 사무라이가 적격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라이들은 원래부터 남색을 많이 했습니다. 외국인의 눈에는 새롭게 보여도 일본에서는 새로울 게 없습니다. 그리고 현대 미국에도 카우보이는 존재하지만 현대 일본엔 사무라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브로크백 마운틴과 같은 연도(2006년)에 발표된 재일교포 극작가 정의신 씨의 연극 '겨울 선인장'은 고등학교 야구선수를 택했습니다. 야구는 일본의 국기나 다름없는 대중 스포츠입니다. 그만큼 고교야구팀도 많아 4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물론 모두 남학생들이기 때문에 고교야구팀이야말로 가장 대중적인 일본 현대남성들의 아성이라 할 것입니다.
동성애자로 지방 소도시 고교야구팀에서 만나 커플이 된 후지오(이한수리)와 가즈야(이얀). 이들은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와 잭 커플의 쌍둥이다.
동성애자로 지방 소도시 고교야구팀에서 만나 커플이 된 후지오(이한수리)와 가즈야(이얀). 이들은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와 잭 커플의 쌍둥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게이 카우보이'하면 뭔가 말 못할 슬픔 같은 게 느껴지는데, '게이 야구선수'는 웃음부터 나지 않습니까? '야구선수를 좋아하는 게이'라면 모를까, '야구하는 게이'라니! 정 씨의 연극은 바로 이런 뭔가 우습고 어이없는 상황을 예리하게 파고들며 우리의 의표를 찌릅니다. 그래서 한없이 웃기면서도 슬픈 상황극을 빚어냅니다.

한국의 조은컴퍼니는 올해 '정의신 작가전'을 열면서 첫 작품으로 겨울선인장(홍영은 연출)을 택했습니다. 2009년 조은컴퍼니가 국내 초연한 작품으로 올해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절찬리에 재공연한 '야끼니꾸 드래곤'의 열기를 6월30일 개막할 국내 초연작 '아시안 스위트'까지 이어가겠다는 포석입니다.

연극엔 모두 다섯 명이 등장합니다. 지방 소도시 고교야구팀 투수인 가즈야(이얀)와 야수인 후지오(이한수리·진영선), 하나짱(조선형·이서율), 베양(박찬우)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숨을 거둔 포수 류지(김기훈)입니다. 류지는 고교시절 회상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가즈야의 결혼선물로 선인장을 들고 나타난 후지오(이한수리)를 위로하는 베양(박찬우)과 하나짱(조선형).
가즈야의 결혼선물로 선인장을 들고 나타난 후지오(이한수리)를 위로하는 베양(박찬우)과 하나짱(조선형).

시대적 배경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20여년. 브로크백 마운틴이 1960년대부터 20여년 세월을 다룬 것과 닮았습니다. 이 시절은 일본에서도 게이라는 사실을 밝혔다간 '호모'로 몰리며 집단 따돌림을 당할 때입니다. 주인공들은 각자 우연히 야구팀에 들어왔다가 서로 비밀이던 성정체성을 확인하고 고민을 나누며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눠가게 됩니다.

무대는 야구장의 라커룸. 고교졸업 후 1년에 한번 씩 모여서 OB대항전에 참여한 주인공들이 시합이 끝난 뒤 라커룸에서 나누는 대사를 통해 극이 진행됩니다. 이들은 사실상 커밍아웃을 한 하나짱을 제외하곤 모두 자신들이 게이임을 감추고 살 수밖에 없는 동병상련의 애환을 교환합니다.

극적 갈등의 주축은 남성적인 가즈야와 여성적인 후지오 커플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입니다. 가즈야는 학창시절 원래 류지와 커플이었지만 류지가 죽고 난 뒤 후지오와 짝이 됩니다. 하지만 가업을 물려받을 후계자로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가즈야는 그들 관계를 용기가 없고 후지오는 그런 가즈야의 우유부단함으로 큰 상처를 받습니다.

결국 가즈야는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부잣집 여성과 사랑 없는 결혼을 택합니다. 후지오는 결혼선물로 선인장 화분을 선물합니다. 아무리 혹독한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라는 뜻을 담아서. 하지만 가즈야는 선인장의 가시가 마음에 걸려 화분을 집어던지고 맙니다. 이 연극의 제목과 관련된 복선입니다.

가즈야와 후지오의 관계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레할)의 관계와 오버랩됩니다. 에니스는 자신들이 게이임을 감추기 위해 위장결혼을 하면서 1년에 한번씩만 휴가지에서 잭과 밀회해 사랑을 나누는 것에 만족합니다. 잭은 그런 그들의 관계를 좀더 영구적으로 만들기를 꿈꿉니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카우보이 게이 커플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레할).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카우보이 게이 커플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레할).

정의선 씨의 작품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재일교포나 게이, 지방극단 배우와 같은 비주류 인생에 포커스를 맞춘다는 점, 극의 중심인물이 비극적 이야기를 끌고 가는 동안 주변인물은 희극적 변죽을 울린다는 점, 철지난 옛 유행가나 옛 영화의 대사를 삽입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눈이나 벚꽃이 흩날리거나 개똥벌레가 대거 날아다니는 시각적 장관을 연출한다는 점 등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이라는 마이너리티를 다루면서 가즈야와 후지오라는 중심인물이 비극을 꾸려가는 동안 조센징 게이인 하나짱과 못생긴 게이인 베양은 자신들을 희화화하며 유머를 변주해냅니다.

'안녕 우리의 학교/안녕 냄새나는 야구부실/안녕 간지러운 거시기/안녕 땀내 나는 유니폼/안녕 무좀 양말'로 시작하는 고교야구부시절 애창가 역시 반복해 등장합니다. 찰리 채플린 영화 <라임 라이트>에 나오는 대사도 등장합니다.
‘안녕 우리의 학교/안녕 냄새나는 야구부실'로 시작하는 해학적인 고교야구부 애창가를 열창하는 베양(박찬우)과 하나짱(조선형) 그리고 후지오(이한수리).
‘안녕 우리의 학교/안녕 냄새나는 야구부실'로 시작하는 해학적인 고교야구부 애창가를 열창하는 베양(박찬우)과 하나짱(조선형) 그리고 후지오(이한수리).

이번 공연에서 유일하게 빠진 것은 눈이 내리는 시각적 장관입니다. 연출가 홍영은 씨가 눈이 내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를 시각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선 이렇게 양식화된 극작이나 연출 스타일을 많이 기피합니다. 일종의 매너리즘이자 자기복제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본에선 좀 다릅니다. 스즈키 타다시나 가라 주로, 히라타 오리자 등의 작품을 보면 이런 양식적 반복을 일종의 독자적 스타일의 완성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합니다.

저는 비극과 희극을 하나로 엮어내 웃음과 울음을 함께 안겨주려는 정의신의 작법을 높이 삽니다. 하지만 그것을 정형화한 캐릭터에 분담시키는 것은 극복해야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비주류들의 삶을 부각시키면서 그들 내부에서 다시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하는 것 같아서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하룻밤 애인에게 폭행당하고 나타난 여장남자 하나짱(조선형)을 위로하는 후지오(이한수리).
하룻밤 애인에게 폭행당하고 나타난 여장남자 하나짱(조선형)을 위로하는 후지오(이한수리).

겨울선인장에서 가즈야와 후지오 커플보다 더 눈길 가는 인물이 하나짱과 베양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가즈야와 후지오보다 더 외롭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존재임에도 끊임없이 자신들을 희화화하는 병풍 같은 존재에 머물고 맙니다. 차라리 가즈야와 후지오의 사랑이야기를 병풍 삼아 그 그늘 속에 감춰진 이들에게서 드라마를 끌어냈으면 어땠을까요.

가즈야와 후지오가 계속 꽃미남처럼 등장하는 것도 눈에 거슬립니다. 게이인 만큼 젊은 시절 멋쟁이로 등장하는 것을 과히 탓할 바는 아니지만 20여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주인공 커플이 헤어스타일 한번 바뀌지 않고 등장한다는 게 극의 감동을 떨어뜨립니다.

사실 게이는 성인이 되서도 유아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이 젊게 사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게이도 세월의 흐름에 변해간다는 것, 아! 게이도 늙는구나라는 느낌을 확실히 살려줄 때 수십 년 세월을 뛰어넘는 그들 사랑의 진가가 더 빛이 나지 않을까요?

6월 19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키 작은 소나무 극장. 1만~2만 원. 02-765-8880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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