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별세한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지조 있는 지성이자 중국 내 한국학 전파자, 광복군에 투신한 독립투사로 다양한 면모의 삶을 살았다. 이 같은 자신의 삶을 그는 1987∼2001년 펴낸 자신의 회고록 ‘장정(長征)’ 다섯 권에 담았다. 그는 장정 제5권이 발간될 때 “역사학자로서 한 조각의 ‘낙서’도 옛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의 보잘것없는 기록도 후세에 이 시대를 관찰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회고록을 썼다”고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 지조 있는 지성
고인은 1988년 1월 6일 당시 대통령 당선자인 노태우 씨와 서울 동빙고동의 한 안가에서 마주 앉았다. 국무총리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는 자리였다. 그는 거절했다. 권유가 거듭되자 그는 노 당선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정 제4권에 나온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난 노 당선자를 두 번 만난 일은 있지만 잘 모른다. 자리를 맡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터인데 무턱대고 중책을 맡기는 풍토는 없어야 한다. 둘째, 나는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 독재자 전두환에게 총리로서 머리가 100개 있어도 고개를 숙일 수 없다. 셋째, 민주주의란 의회정치인데 총리가 어떻게 반민주주의자들과 협력해서 민주화를 실현할 수 있겠는가. 넷째, 나는 교육자다.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제자가 아직도 감옥에 있는데 스승이라는 자가 어떻게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있겠는가. 다섯째,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굽실굽실하는 풍토를 고쳐야 한다.”
이 일화에서 나타나듯 그는 24세 때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에 투신한 독립투사의 기개를 평생 간직하고 살았다. 광복 직후 이범석 장군의 영입 제의부터 4·19혁명 후 장면 내각의 주일대사, 5·16군사정변 후 김종필의 공화당 사무총장,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통일원 장관, 노태우 대통령의 총리, 김영삼 대통령의 교육개혁위원장, 김대중 대통령의 제2건국추진위원장 제의까지 모든 관직을 물리쳤다. 그가 받은 관직 제의 횟수는 모두 12차례나 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1985년에는 독재정권의 탄압과 간섭에 맞서다 고려대 총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때 고려대 학생들이 ‘총장사퇴 결사반대’ 운동을 전개한 것을 그는 평생의 영예로 여겼다.
1955∼1965년에는 월간 ‘사상계’ 편집위원, 주간, 부대표직을 맡으며 주필이었던 장준하와 함께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했다. 4·19혁명 시위에 참가하고 군사독재 반대운동에도 가담했다. 1988년 사회과학원을 창립해 이듬해부터 2004년까지 ‘계간 사상’을 발행했다. ○ 독립투사의 변함없는 면모
고인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평안북도 강계군 시중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 해 신의주동중(신의주고보)에 들어갔는데 이때부터 민족정신과 반골정신이 형성됐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일제강점기를 회상하면서는 “나라 없는 시대 동아일보는 우리 마음속의 정부(政府)였다”고 회고(책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하기도 했다.
일본 게이오대 동양사학과에 재학 중이던 1944년 그는 일제에 의해 학병으로 징집돼 중국에 배치됐다. 곧 일본군에서 탈출해 중국 유격대와 임시정부, 광복군에 참가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자유민권운동가로 활약한 장준하와 함께 충칭(重慶)에 있는 광복군에 합류했고, 이범석·이청천 장군의 부관과 김구 주석 밑에서 임정신문을 만들며 광복군 소령으로 활약했다. 중국 항일 활동 기간에 장준하 윤재현과 함께 잡지 ‘등불’을 발행하기도 했다.
고인은 당시 상황에 대해 저서 ‘역사의 신’에서 “중국 유격대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충칭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까지 6000리 장정을 하는 동안 너무 고생스러워 동행했던 장준하 동지와 함께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고 수없이 절규했다”고 밝혔다. ○ 통일 위해 공산권 연구한 학자
고인은 1957년 고려대 내에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창설해 한국 학계의 국제화에 기여했다. 또 통일을 하려면 북한을 잘 알아야 한다는 판단 아래 이듬해 아세아문제연구소에 공산권연구실을 만들어 국내 처음으로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연구를 했다. 1970년에는 국내 최초로 통일문제에 관한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
1962∼1976년 총 5권의 ‘한국공산주의 운동사’를 2007년 작고한 김창순 북한연구소 이사장과 함께 집필했다. 북한이 독립운동사를 왜곡하려는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쓴 것이다.
고려대 총장직에서 사퇴한 뒤에는 당시 정식 수교를 맺지 않은 중국과의 학술문화교류에 노력했다. 중국 내 11개 유명 대학에 한국학연구소도 설치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청사 복원을 포함해 한국의 역사와 인물이 중국에 남긴 흔적을 찾아 사적화하는 일도 그의 주요 관심사였다. 2009년에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국제교류재단으로부터 특별공로상을 수상했다.
1987년 헌법 개정 때는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을 명시하도록 했다. 1993년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 봉환과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건의해 관철했다.
고인은 2008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요즘 일부에서 얘기하는 사회주의는 유럽식 사회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에 가깝다”며 “러시아와 베트남, 중국의 공산주의가 다 변했는데 변하지 않은 북한을 바라보는 건 곤란하다”고 말한 바 있다. ▼ “진리는 반드시 승리… 현실 말고 역사에 살아라” ▼ 후세에 당부한 말말말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라. 역사의 신을 믿으라. 정의와 선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고인은 2008년 본보 인터뷰에서 후세대에 귀감이 될 만한 말을 부탁받자 자신의 논설집 ‘역사의 신’ 표지에 쓰인 글귀를 빌려 이렇게 말했다.
한국처럼 작은 나라에서는 인재를 키워야 살 수 있다는 소신도 평소 피력했다. “유능한 인재가 혼자 잘해선 안 되며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당부였다. 이런 소신에 따라 다음과 같은 글귀를 좌우명으로 삼기도 했다.
“일은 사람이 한다. 사람은 유능해야만 큰일을 할 수 있고, 유능한 사람들이라도 힘을 합쳐야 위대한 일을 이룩할 수 있다.”
자신이 그렇게 거부했던 학자들의 정치 참여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능력이 안 되고 취미가 맞지 않아 정치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인간의 기본 욕망이 생존과 돈, 벼슬 욕심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정당하게 돈을 번 사람들, 정당하게 벼슬하는 사람들은 존경받아야 하며 단 그런 사람들은 계속해서 정당하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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