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이가 환생한 것 같았다.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일류 대학 의상학과에 합격하고도 무능력한 어머니와 철없는 여동생을 돌보기 위해 진학을 포기한 채 생계 전선으로 뛰어들 수박에 없었던 그녀는 심청의 후예가 분명했다.
눈 먼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져 '효'의 상징적 존재가 된 심청과 비교해도 모자랄 것이 없는 그녀, 바로 '동안미녀'의 '이소영(장나라 분)'이다.
가족 간에도 개인주의 성향이 점점 더 심해지는 현실에서 사기와 빚보증으로 집안을 풍비박산 만들고 사라진 아버지를 원망할 겨를도 없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대학 진학 대신 취업에 나선 그녀의 행동에서 인당수에 몸을 던지던 심청의 비장함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학벌 의식이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그녀는 저주 받은 심청일 뿐이었다. 고졸 학력의 이소영이 우수사원 표창을 두 번씩이나 받을 정도로 원단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성실함 덕분이었다.
최선을 다 하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밝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심청이 받았던 보상과 같은 인생의 행운은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그녀에게 붙여진 꼬리표는 아무리 노력해도 떨어지지 않는 '신용불량자'였다.
그것도 사치스런 명품에 정신이 팔린 여동생 때문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급기야 14년 근속했던 직장에서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해고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가족과 직장을 위해 자신을 헌신했지만 결과는 고졸 학력의 나이 많은 해고자에 신용불량자라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치명적인 결함뿐이었다. 희생에 대한 보상으로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심청이와 달리, 그녀는 아무 데서도 받아주지 않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백수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자신의 의지나 생각과 전혀 상관없이 벌어지는 수난으로 인해 가족에 대한 인내력은 바닥을 드러내면서 폭발하기도 하지만, 노처녀 가장이라는 그녀의 현실이 변한 것은 아니다. 급기야 그녀는 피팅 모델로 아르바이트 하기로 해놓고 사라진 여동생 대신 나간 패션 회사에서 나이를 속이고 한참 어린 동생뻘 직원들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게 된다.
34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0대 미성년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절대 동안(童顔) 덕분에 9살이나 속이고 동생 이름으로 아르바이트 전선에 나선 것이다. 거짓말로 위장 취업한 사상 초유의 상황이 언제 들통 날지 두려웠지만, 오랜 꿈이었던 패션 디자이너의 공간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마치 디자이너가 된 것처럼 행복했다.
게다가 그녀의 재능을 알아봐주는 상사는 물론, 능력 있는 남자들의 사랑도 넘쳤다. 그녀는 이렇게 저주 받은 심청에서 해피엔딩의 신데렐라로 자리 이동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소영은 결코 백마 탄 왕자님의 사랑으로 신분 상승하는 신데렐라가 아니었다. 만약 이소영이 신데렐라였다면, 그녀가 겪었던 수난과 시련은 그녀를 구원의 대상으로 몰아가기 위한 동화 속 상황에 그치면서 '학벌'과 '청년실업'이라는 현실 세계의 사회 문제를 환기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동안미녀'에서 그녀가 겪는 일련의 상황들은 현실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울 만큼 황당무계하다. 그러나 비현실적이며 과장된 상황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만 하기는 어렵다.
개연성 부족으로 현실적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다는 한계가 있긴 했으나, 이소영이 처한 상황 속에서 '학벌'과 '청년실업'이라는 지금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간헐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경쟁 구도가 치열한 사회에서 이소영은 로맨틱한 사랑의 주인공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상징하는 인물로 존재감을 갖는다.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이소영은 거친 현실에서 살아남을 만큼의 뚝심을 지닌 여성이다.
여동생이 가져간 명품 옷 때문에 벌어진 나이트클럽에서의 사건으로 악연을 맺게 된 연하의 남성 최진욱(최다니엘 분)이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위해 CCTV에 찍한 사진으로 전단지를 만들어 붙이자 공중전화를 이용해서 '고자' 운운 하며 그의 자존심을 긁어대는 그녀의 모습 그 어디에서도 신데렐라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다구니 쓰는 처절한 몸부림만이 보일 뿐이다. 지나칠 정도로 여자 나이를 따지는 남성들을 향해 "여자가 나이 먹을 때 남자는 이슬 먹었냐!"라고 소리 지르는 그녀의 모습이 속 시원해 보이는 것도 그래서이다.
임시직으로 일하면서도 같은 소속의 디자이너가 한참 어린 여고 후배인 것을 알고 군기를 잡고,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최진욱 때문에 명품 매장에서 겪은 수모를 갚기 위해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앞둔 최진욱에게 김치 국물을 쏟아 붓는 모습이 통쾌하면서도 슬퍼 보이는 것은 그녀의 당찬 행동 위로 사회적 약자로서의 설움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그녀가 걸어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아웃도어 디자인 경합과 영화제 시상식 드레스 경합 등 그녀 앞에 놓인 지난한 경합 과정은 단순한 경쟁이 아닌, 사회적 약자의 제도권 도입을 거부하는 기득권의 강력한 제지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의의 경쟁이라 하더라도 출발선이 다르다면, 그것은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없다. 고졸 출신의 복장학원 출신으로 해외 유학파 출신의 디자이너 강윤서(김민서 분)를 상대로 경합을 치루는 것은 체급이 다른 선수를 맞붙게 하는 불공정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벌과 경력보다 더 강력한 경쟁력은 생존에 대한 처절함이다.
이소영은 타고난 재능과 생존 본능으로 경합에서 살아남는다. 그녀에게 디자인 경합은 무한 경쟁 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원단조차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경쟁 상황에서 그녀가 마침내 승리의 축배를 드는 순간, 세상의 모든 사회적 약자는 감격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야 하는 이소영과 자존심 때문에 경합에 나서는 강윤서의 대립 구도는 어쩌면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한 은유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학벌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고졸 학력의 30대 여성이 해외 유학파를 상대로 경합에서 승리하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상황일지 모르지만, 학벌에 밀려 실력을 평가받을 기회조차 갖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할 정도로 대단히 통쾌한 일이다.
사회적 약자를 상징하는 존재이지만 그녀에게도 흠은 있다. 사회적 약자를 상징하던 이소영에게 '모성'의 역할이 부여되는 순간 '전사(戰士)'로서 그녀의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패션 회사 대표이사이자 이혼남인 지승일(류진 분)의 딸에게 더 할 나위 없이 자상한 어머니의 모습, 소년의 이미지가 남아 있는 최진욱에게 어머니 혹은 누나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 때문에 학벌과 나이의 편견에 맞서 싸우던 그녀는 전사의 자리에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여성으로 자리이동 한다.
이것이 이소영이 극복하지 못한 한계이자,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문제점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소영의 존재가 빛을 발하는 것은 명랑하고 쾌활한 소녀의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의 굴곡을 담아내는 배우 장나라의 깊이 있는 연기 덕분이다.
물론 소녀의 감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발음이 다소 거슬리기는 한다. 그렇지만 고졸 학력의 복장학원 출신으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노처녀 가장 이소영의 설움이 배우 장나라의 표정 연기를 통해 제대로 표현되고 있다.
'동안미녀'의 이소영은 지금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헐벗은 청춘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절대 동안이라는 극적 설정이 이소영을 문제적 인물로 만든 점은 있다.
그래도 만약 그런 설정이 아니었다면 우리 사회가 직면한 청년실업과 학벌, 나이, 외모 지상주의에서 비롯한 사회 문제를 간헐적으로라도 제시하지 못했으리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만큼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소영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요된 여성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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