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그것]시인 김용택의 ‘책’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7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초보교사 때 책에 묻혀 살던 날 산-강-나무가 詩로 말을 걸어왔다

동아일보 DB
동아일보 DB
“그러게, 그놈의 새끼가 왜 왔냐고. 거기가 어디라고 왔냐고. 하하하.”

시인 김용택(63)이 40년 전을 회상하며 웃는다. 전북 임실군 청웅초등학교 옥석분교를 가려면 말이지, 신발 양말 다 벗고 바지 걷어붙여서 또랑(개울)을 네 개는 건너야 해. 버스에서 내려서 한 시간은 족히 걸어야 한다니까. 달랑 선생님 3명인 학교를 월부 책 외판원이 뭐더러(왜) 찾아왔나 몰라….

1970년 어느 날이었다. 부임한 지 이제 몇 개월 된 22세 초보 교사는 심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외판원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낸 책 광고전단 뭉치에서 뭔가가 눈에 띄었다. ‘도스토옙스키 전집.’ 판형이 크고 장정이 화려했다. 태어나서 그때껏 책하고는 담쌓고 지냈던 그가 뭐에 홀렸는지 덜컥 12개월 할부로 계약을 했다. 멋진 케이스에 든 전집이 배달돼 왔지만 읽지는 않았다. 하숙방에 누워 ‘목침으로 안성맞춤이겠네’ 하며 쳐다보기만을 몇 달. 겨울방학을 며칠 앞두고 ‘대체 뭐가 쓰였나’ 하는 마음에 첫 장을 들춰 본 후, 그는 미쳐 버렸다.

○ 책이 그렇게 오다

“책을 읽은 기억이 안 나.”

김 시인은 농사짓는 40여 가호가 모여 살던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진메마을)에서 태어났다. 일본에 징용을 갔다 온 아버지와 안양 방직공장에서 일했던 어머니의 4남 2녀 중 장남. 그의 부모가 어렵게 마련한 논 예닐곱 마지기는 그와 형제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자 가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전형적인 가난한 농사꾼 집안이기도 했고, 공부엔 관심이 없기도 했기에 초등학교와 순창중, 순창농림고(현 순창제일고)를 다니면서 그가 본 책은 교과서 말고는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그가 기억하는 ‘다른’ 책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반 친구가 이언 플레밍의 소설 ‘007 위기일발’ 문고판을 가져왔다. 매우 예뻤다. 마침 수학책이 없던 그 친구에게 자기 수학책과 소설을 바꾸자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다닌 고교생활이었다. 희한하게도 자기 이름으로, 그것도 학교에서 동아일보를 구독했다. 용돈도 받아보지 못했는데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버스에 치여 숨진 뒤 유고시가 실렸던 시인 김수영, 동아일보에 소설 ‘길’을 연재하던 작가 손창섭 정도가 머리에 떠오른다. 명색이 시인인데 교과서에 실린 숱한 시는 한 편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랬던 그에게 책이 확 다가온 것이다.

처음 집어든 책은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야, 이게 너무 재미있는 거야.” 복잡한 등장인물 이름을 따로 메모해놓고 확인하면서 읽는데 성가시다는 느낌이 눈곱만치도 들지 않았다. 방학이 되자 전집을 싸들고 고향에 왔다. 낮에는 친구들과 산에 나무하러 다니다 밤에 책을 읽었다. 나중에는 나무하러 가는 것도 잊어먹고 책을 읽었다. 전집 6권을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다 읽어냈다.

개학을 앞두고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집을 나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30∼40분 동안 김 시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상이 다시 보이는 거였다. 달리 보이는 거였다. 늘 보던 풍경이 새롭게 보였다. “강물 소리도 멋지고, 산도 대단하고, 겨울 들판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 세상이 바뀐 거야. 그렇지, 내가 바뀐 거야.” 평소 무덤덤하게 보던 나무가, 하늘이, 산이 온갖 말로 다가왔다. 아니, 그가 품고 있던 이 모든 것, 자연에 대한 생각이 밖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왜 그런지 그때는 잘 몰랐다. 책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어렴풋하게나마 생각이 든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 시가 그렇게 오다

책 외판원은 또 시내를 건너왔다. 이번에는 저자의 이름이 멋져서 ‘헤르만 헤세 전집’을 샀다. 책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김 시인이었기에 선택은 즉흥적이었다. 다 읽고 났더니 외판원은 ‘앙드레 지드 전집’을 추천했다. 책의 마력에 빠진 사람이 산골에 있다는 걸 알아차린 외판원은 이후 1년 남짓, 그가 책을 다 읽었다 싶으면 학교를 찾았다. ‘박목월 전집’(전 10권), ‘이어령 전집’(전 10권), ‘서정주 전집’ 등을 아귀처럼 꼭꼭 씹어 삼켰다. 책을 더 읽게 되자 새롭게 보이는 그의 주변과 자연을 표현하고픈 말들이 점점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신에게 닥친 이런 변화를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었기에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972년 자신의 모교인 임실 덕치초등학교에 부임했다. 다른 선생님이 갖고 있던 어문각 판 ‘한국문학전집’(전 50권)을 달라고 했다. 책값은 6개월에 나눠 주기로 했다. 한국 근현대 작가의 시, 소설, 평론이 총망라된 책들을 1년 내내 읽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책을 봤다. 잠깐 잠을 청한 뒤 학교에 출근해서는 직원조회 할 때까지 책을 읽었다. 수업을 마치고는 책을 읽으며 걸어오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동생들 학비에 부모가 진 빚까지 갚느라 월급날에는 빚쟁이들이 교문 앞에 줄을 섰어도 개의치 않았다. 볼 책만 있으면 됐다.

어느 날 전주에 가서 헌책방 거리를 처음 보게 됐다. 서가에는 ‘현대문학’ ‘문학사상’ 같은 문예지 과월호가 잔뜩 꽂혀 있었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뿌리 깊은 나무’도 이때 알게 됐다. 한 권에 10∼20원 하던 옛 잡지를 사서 커다란 여행가방에 잔뜩 싣고는 임실 가는 버스를 탔다. 정류장에 미리 갖다 뒀던 지게에 가방을 지고 마을로 들어서는 일이 반복되자 이웃들은 “용택이 저거, 미친 거 아니여”라고 수군댔다.

그렇게 책에 빠져 살던 어느 날 밤. 일기를 쓰던 김 시인은 공책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내가 일기를 쓰다 시를 써버린 거야. 얼마나 놀래부렀겠어. 주위에 (시를 알 만한) 아무도 없으니까 물어보지도 못하고, 환장하겠더라고.” 그렇게 일기를 쓰다, 시를 쓰는 일이 10여 년 거듭되면서 습작노트가 쌓였다. 그러던 1981년이었다. 써놓고 보니 그럴듯했다. 진짜 시 같았다. ‘섬진강 1’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듬해 그의 등단작 중 첫 번째 작품이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시작한 오리 키우기가 쫄딱 망한 뒤 하릴없이 지내던 그가 교사가 된 건 어찌 보면 운명이었다. 철호라는 친구가 강권을 하고 접수까지 대신 해준 덕에 초등임시교원양성소 시험에 응시했고 합격했다. 뭐가 되고 싶은지도 몰랐던 그가 이후 38년을 교사로 살았던 바로 그것만큼, 그에게 다가온 책과 시도 운명이었다고 김 시인은 믿는다.

○ 자연과 아이들이 나를 바꾼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김 시인은 어쩔 줄을 몰랐다. 교사라는 소명의식이 뚜렷한 것도 아니었다.아이들에게 손찌검도 했다. 그런 그가 책을 읽어가면서 선생을 계속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가난한 마을에서,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서 선생을 계속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지. 싸가지 없게도.” 그의 나이 27세쯤 됐을 때였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니 책이 더 잘 읽혔다. 그러다 보니 살고 있는 세상이 더 자세히 보였다. 나무와 산은 언제 봐도 완성돼 있으면서 늘 새로웠다. 아이들은 이해타산이 아니라 정직과 진실을 통해 만났고 어울렸다. 자연과 아이들은 참 아름다웠다. 다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름다웠고, 마음의 문이 없기 때문에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자연은, 아이들은 늘 그를 가르쳤다.

“교육은 감동이야. 가르치면서 배워야 감동이 있는 거지. 공부라는 게 별 건가. 남의 이야기 잘 듣고, 잘 보고 그 말이 옳으면 내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거잖아. 자연과 아이들이 나를 바꾼 거지.”

교단을 떠난 지 3년.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고치고 바꿀 준비가 돼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