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칼럼] 김기덕의 ‘풍산개’ “넌 누구 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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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12일 14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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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김기덕의 진중한 복귀작…초저예산 영화
●김기덕 영화 인생의 커다란 전화점이 될 영화

김기덕필름 영화 ‘풍산개’에서 주연 윤계상(왼쪽)은 대사 한마디 없는 독특하고 거친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했다. 김규리도 북한 말투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수준급 연기를 선보였다. 뉴 제공
김기덕필름 영화 ‘풍산개’에서 주연 윤계상(왼쪽)은 대사 한마디 없는 독특하고 거친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했다. 김규리도 북한 말투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수준급 연기를 선보였다. 뉴 제공

한 남자가 휴전선을 넘습니다. 동작이 재빠르고 민첩합니다. 그는 지금 한 여자를 데리러 평양으로 가는 길입니다.

약속했던 세 시간이 다 지나기도 전에 이 남자는 다시 휴전선을 넘습니다. 이번에는 한 여자와 함께 입니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평양에 다녀온 겁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가시라요."

약속장소에 가까워 오자 여자가 말합니다. 남자가 그냥 가려고 하자 여자가 말뜻도 모르는 바보라며 투덜댑니다. 남자는 잠시 주저하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뭅니다. 담뱃갑에는 '풍산개'라고 써 있습니다.

원래 이 남자는 이산가족의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휴전선을 넘나들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임종을 앞둔 이산가족들이 생애 마지막 소원으로 북에, 또는 남에 두고 온 가족들에게 마지막 소식을 전해주는 일을 해 왔습니다. 때로는 비디오 테이프를, 때로는 편지를, 또 때로는 어린 손자를 전달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국정원의 의뢰를 받고 여자를 데려온 후,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에게 집요하게 묻기 시작합니다. '넌 어느 편이야?' 라고요.

하지만 남자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추측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가족은 보이지 않고 홀로 지하 음침한 아지트에서 생활합니다. 짧게 깎은 머리나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기도 애매합니다. 말을 하지 않으니 사투리나 어조를 알 수도 없습니다.

북한에 가면 자전거를 타고 남한에 오면 오토바이를 탑니다. 이런 그를 두고 휴전선을 넘던 중 여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동무 피에서는 이상하게 피비린내가 나지 않아요' 라고요.


■ "2억원의 예산으로 영화가 가능해?"

'풍산개'는 김기덕 감독이 각본을 쓰고 제작을 한 영화입니다. 연출은 조감독 출신인 전재홍 감독이 맡았습니다. 김기덕 사단의 영화답게 초 저예산인 2억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정도 금액이면 스태프들 밥값과 교통비를 충당하기에도 빠듯했을 겁니다. 순 제작비가 100억, 200억을 넘어 300억 원이 넘는 영화가 횡행하는 시대에 그는 예산 규모로만 보면 '저예산 종결자'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상업적으로 '대박'이 났습니다. 개봉 2주 만에 극장 관객 수가 60만이 넘었습니다. 멀티플렉스 상영관의 스크린 절반을 '트랜스포머'가 차지하고 있는 와중에도 250개의 스크린을 지키고 있습니다. 순 제작비만 보면 현재 스코어 기준 열 배의 수익이 제작사에 돌아가는 셈입니다.

참 기묘합니다. 김기덕 감독은 얼마 전 칸에서 작품 자체보다는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한국 영화계를 비판했습니다. 이를 따라 자신을 떠난 제자 감독에게도 실망을 드러냈습니다.

작품 활동 초창기에는 '야생동물보호구역'이 10만을 넘기지 못하면 다시는 영화감독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기도 했고, 2006년 '시간'이라는 작품이 흥행에 참패를 했을 때는 다시는 한국에서 자신의 영화를 개봉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습니다. 역시 인생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건가 봅니다.

사실 영화는 저 예산 독립영화의 기본적 특성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설정이 너무나 많이 있지요. 임진각에서 평양을 세 시간 만에 갔다 온다던가 장대 하나로 DMZ 를 자유롭게 넘나든다는 것은 따지고 들자면 말이 안됩니다. 풍산이 축지법을 쓰는 무협의 검객도 아니고 타고 다니는 자전거가 트랜스포머의 범블비도 아니잖아요.

풍산과 인옥이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쫓기게 되는 추격신 역시, 휴전 중인 한 나라의 삼엄한 국경이라기 에는 너무나 빈틈이 많이 보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지뢰를 밟았는데 그냥 멀쩡하게 걸어 나간 장면도 있었군요.(참고로 지뢰가 터지는 장면 역시 장난감 폭죽 터지는 수준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만약 '김기덕'이라는 필터가 없었다면 관객들이 이런 부분에 대해 지금과 같은 너그러움을 보였을까 의문입니다. '김기덕'이라는 브랜드는 마치 마법과 같이 관객들이 상업영화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저 예산 독립영화에 대한 관용을 가지고 영화를 보게 만들었습니다.

김 감독이 변방에서 토해내던 울분이 이번에는 오히려 영화가 주류로 진입할 수 있도록 방패 역할을 하는 듯 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역시 앞날은 알 수가 없습니다.


■ 불편함이 없는 최초의 김기덕 브랜드 영화

그렇다고 작품의 의미를 외면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풍산개'에는 분명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힘이 있습니다. 말이 안 된다고는 했지만 참신한 소재임에는 분명합니다. 남과 북이라는 어려운 주제에 진지하게 접근하지만 무겁지만은 않습니다.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블랙 코미디는 깨알 같은 웃음을 줍니다. 이야기 전개도 빠르고 시원시원합니다. 배우들의 호연 역시 빼 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대사 한 마디 없이 온 몸으로 풍산을 표현해 낸 윤계상이라는 배우, 다시 봤습니다. 이제 당신을 전 '지오디(GOD)' 멤버로 기억하는 일은 없을 듯 합니다.

또 하나, 이 영화에는 김기덕 감독 특유의 불편함이 없습니다. '강간영화'라는 혹평까지 들어야 했던 극단적인 여성관이라던가 늘 논쟁의 대상이었던 소재, 고개를 돌리고 싶게 만들던 집요함과 잔인함이 이 영화에는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김기덕 사단의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마도 일부 팬들은 김기덕 감독의 '비전형적'인, 그래서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강렬함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영화계의 이단아가 대단한 상업적 흥행을 거두었으니(여기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08년 '영화는 영화다'는 잠시 논외로 하겠습니다),

좋든 싫든 '풍산개'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될 겁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앞으로 이렇게 다그칠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국제영화제의 작가 감독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그토록 비판하던 국내 극장가의 흥행감독입니까? 당신은 어느 쪽 입니까?"

정주현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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