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이야기]<68>수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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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12일 03시 00분


배고프던 시절에 먹던 음식… 중년층 향수 자극

수제비는 향수를 자극하는 음식이다. 애호박이나 김치를 썰어 넣고 끓인 수제비를 먹으면 고향집과 어머니 손맛이 떠오른다. 중년층에게 수제비는 아픈 추억이다. 배고프던 시절에 먹던 음식이기에 애증마저 느껴진다. 이렇게 수제비는 한국인의 감성을 자극한다.

수제비를 6·25전쟁 때 구호물자로 들어온 밀가루에서 비롯된 음식으로 아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유래를 알고 보면 수제비에는 의외의 사실이 많이 담겨 있다.

수제비는 역사가 오래된 음식이다. 수제비라는 음식 이름은 최소 조선 중기 이전부터 있었던 낱말이다. 조선 중종 12년인 1517년에 발행된 ‘사성통해(四聲通解)’라는 중국어 통역서에 수제비라는 단어가 수록돼 있다. 박탁(34)이란 단어를 설명하면서 속언(俗言), 그러니까 우리말로 수저비(水低飛)라고 부른다고 적혀 있다.

그러니 늦어도 16세기 초반 이전부터 수제비를 먹었다. 그리고 당시 외국어 사전에 수록될 정도면 비교적 익숙했던 음식이었을 것이다. 또 빈민들이 먹었던 허드레 음식으로만 소개돼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말로 ‘수저비’라고 설명해 놓은 박탁은 6세기 중국 북위(北魏) 때 가사협이 쓴 농업책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도 그 요리법이 나온다. 밀가루 음식 만드는 법 중에 반죽을 손가락 크기로 주물러 끓는 물에 젓가락으로 끊어서 넣어 만든다고 설명해 놓았다. 반죽을 손으로 뜯어 넣는지, 젓가락으로 끊어 넣는지의 차이가 있을 뿐 지금의 수제비와 크게 다를 게 없다.

6세기면 국수가 막 생겨날 무렵이니 곡식가루를 반죽해 손이나 젓가락으로 뜯어 넣어 끓이는 수제비야말로 국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제비는 넉넉지 못했던 시절에 먹던 음식이니 주로 서민음식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수제비 만드는 재료와 방법에 따라 잔치국수처럼 양반집 잔칫상에도 놓였다.

잔칫상에 올랐다는 수제비는 밀가루가 귀했던 시절에 밀가루 또는 쌀가루로 만든 것이었다. 지금 쌀로 수제비를 끓인다고 하면 낯설게 느껴지지만 예전에는 시골에서 추수가 끝나 곡식이 풍부할 때 밀가루 대신 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었다.

추수가 끝난 후 쌀은 있지만 밀가루는 없고, 또 밀가루 살 현금도 없으니 쌀가루로 수제비를 끓여 별식으로 먹었다. 쌀이나 밀가루 반죽을 떼어내 장국에 넣으면 둥둥 떠서 끓는 것이 마치 물고기가 헤엄을 치는 것 같다고 해서 수제비를 발어(撥魚)라고도 불렀다.

숙종 때 홍만선이 쓴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영롱발어’라는 음식이 보이는데 메밀가루를 반죽해 잘게 썬 쇠고기나 양고기와 함께 수저로 떠서 팔팔 끓는 물에 넣으면 메밀로 된 수제비는 뜨고 고기는 가라앉는데 그 모습이 영롱하다고 나온다. 여기에 표고버섯, 석이버섯을 넣고 소금, 장, 후추, 식초로 간을 맞춰 먹는다고 했으니 지금으로 치면 고급 메밀수제비라고 할 수 있다. ‘산약발어’도 있는데 산약(山藥)은 마를 이르는 말이니 마로 만든 수제비다. 메밀가루에 콩가루와 마를 섞어 수저로 떼어 끓는 물에 넣은 후 익기를 기다렸다가 먹는다고 했다. 영롱발어나 산약발어는 모두 원나라 때 ‘거가필용(居家必用)’이라는 요리책에도 보이니 수제비를 별식으로 만들어 먹은 역사는 무척 오래됐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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