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부티크를 운영하던 디자이너 강모 씨(56·여)는 지난해 말 유명 백화점 2곳에서 운영하던 매장을 철수했다.
2년 전 백화점에 입성할 때만 해도 주위에서 축하인사를 많이 받았다. 백화점 입점으로 브랜드 인지도도 높아지고 디자인이나
품질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강 씨는 예상치 못한 인테리어 비용을 3500만 원이나
지출했다. 백화점에 내야 하는 판매수수료는 매출의 37%나 됐다. 백화점 행사 협력 등의 명목으로 이런저런 경비가 계속 늘어났다.
100만 원어치 옷을 팔면 생산원가는 판매가의 33%에 불과하지만 백화점 판매수수료 37%를 떼어주고 매장에 파견하는 판매사원
인건비 14%, 물류비 등 고정비 7∼10%를 제하고 나면 강 씨가 손에 쥐는 돈은 매출액 100만 원에서 불과 5만 원
안팎이었다. 오히려 강 씨는 백화점 할당 매출 목표에 미달한다며 백화점 측으로부터 봄가을에 두 차례 판매가보다 70∼80% 가격을
낮춘 기획상품전을 강요당했다. 결국 그는 더 견디지 못하고 백화점을 나왔다. 이에 대해 해당 백화점 측은 “수수료 37%는 매장
임대료 외에도 광고, 판촉, 전기료 등을 모두 감안해 책정한 수수료”라며 “자세한 내용은 영업기밀”이라며 입을 다물었다.
대형 백화점들은 과도한 수수료와 각종 부대비용을 요구하며 입점업체들을 억누른다. 최대 40%에 이르는 판매수수료는 결국 소비자들에게 전가될 가능성이 높다.
구두 디자이너 S 씨(42·여)는 백화점에 어렵게 입점했지만 매출이 오르지 않자 입점 6개월 만에 같은 층 구석으로 매장을
옮기라는 통보를 받았다. 백화점에서 매장을 옮기는 것은 단순히 자리를 옮기는 것이 아니다. 대리석으로 바닥공사를 하고 조명과 가구
등 인테리어를 다시 해야 하기 때문에 적게는 2000만 원, 많게는 5000만 원까지 든다. 하지만 S 씨의 셋방살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3개월 만에 해외 브랜드에 매장을 내줘야 한다며 또 한번 자리를 옮겨야 했던 것. 결국 S 씨는 2009년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쫓겨나다시피 백화점을 나왔다. S 씨는 “백화점이 외치는 ‘상생’ 구호는 허울 좋은 홍보문구일 뿐 높은 임대료를
받는 부동산업자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말했다. ▼ 이런 대안- 신세계 “판로-경영 컨설팅 해드립니다” ▼
‘견리사의’(見利思義).’
홍삼 제조업체인 삼흥의 윤청광 사장(50)은 사업을 시작하며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
1997년 회사를 세울 때 큰아버지가 직접 써 준 글귀를 액자에 담아 아예 인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회사 2층 회의실에
걸어뒀다. 액자 옆에는 ‘눈앞에 이익이 있을 때 먼저 의리를 생각하라. 이로움이 생겼을 때에는 먼저 옳고 그름을 생각한 뒤
취하라’라는 설명도 달아 놓았다.
윤 사장은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에 입점해 ‘강개상인’이란 브랜드로 홍삼 제품을
판매하는 연매출 100억 원 규모의 중소기업 대표다. 2001년부터 10년 동안 신세계백화점과 ‘견리사의’를 지키며 회사를 키워온
그는 “회사를 꾸릴 때는 물론이고 파트너를 구할 때에도 당장의 이익보다 오랜 시간 정도(正道)를 지킬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본다”고 강조했다.
○ 판로 열어주고 상품 개발도 지원
비록 삼흥이라는 사명을 달고 사업을
한 지는 14년밖에 안 됐지만 인삼과의 인연은 윤 사장의 증조부 시절로 올라간다. 윤 사장 집안은 대대로 인삼 재배를
업(業)으로 삼아왔다. 증조부 때부터 이미 개성과 강화도를 오가며 인삼을 길러 팔았다. ‘강개상인’이란 브랜드 이름도 강화도와
개성의 앞 글자에서 따왔다.
이 회사는 인삼을 5번 찌고 강화도의 햇살과 해풍(海風), 밤 서리와 이슬 속에서
5번 말리는 ‘5증5포’ 방식으로 시장을 확대했다. 이렇게 하면 일반 홍삼보다 인체 면역력도 높아지고 항암 효과도 커진다. 좋은
품질을 바탕으로 각종 상품을 만들자 매출도 뛰기 시작했다. 2003년 65억7000만 원이던 매출은 지난해 108억 원까지
늘었다. 5명이던 직원은 105명으로 20배 이상으로 뛰었다.
삼흥의 성공에는 신세계백화점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다. 2001년부터 삼흥과 인연을 맺어온 신세계백화점은 삼흥이 홍삼 시장에 뛰어들 때에도 지원군 역할을 톡톡히 했다. 홍삼의
원료가 되는 수삼을 구입하기 위해 목돈이 들어가는 매년 10월이면 신세계백화점이 2억 원을 빌려줬다. 수삼 구입 전 신세계
상품과학연구소는 상품 품질을 검사해 좋은 품질의 홍삼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안정적인 판로 확보도 큰 힘이 됐다.
제품 개발과 회사 경영도 마찬가지다. 신제품을 개발할 때에는 신세계백화점 디자인팀이 제품 포장 디자인을 함께 하고, 매년 삼흥
직원을 초청해 인력 관리와 비용 절감, 회사 운영 매뉴얼을 만드는 방법까지 각종 노하우를 전수해줬다. 수수료도 평균보다 낮게
책정해 삼흥을 도왔다.
신세계백화점은 2009년부터 아예 ‘중소 협력회사 육성 컨설팅’ 프로그램을 만들고 삼흥을
1호 기업으로 선정했다. 경리팀, 인사팀, 마케팅팀, 상품과학연구소, 동반성장추진팀 등 각 부서 직원 10명을 뽑아 삼흥을
종합적으로 지원한 것. 김자영 신세계백화점 동반성장추진팀장은 “삼흥을 시작으로 반기마다 매입팀별로 중소협력사 한두 개를 추천받아
종합컨설팅을 지원해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흥은 다음 달 홍콩으로 첫 수출을 시작한다.
○ 홈쇼핑으로 일군 귀농의 꿈
전남 무안에서 유기농 고구마를 키우는 해야농장 김기주 대표(56)는 2008년 CJ오쇼핑으로부터 ‘수수료 한 푼 받지 않고
물건을 팔아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김 대표는 “대기업들도 판매가의 절반 가까운 수수료를 내고 팔아야 하는
홈쇼핑에서 왜 고구마를 공짜로 팔아주겠다고 하는지 의아했다”고 말했다.
사실 김 대표의 고구마가 이런 ‘특혜’를
받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도시에서 살다 1998년 고향인 전남 무안으로 내려온 김 대표는 고구마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무안은
‘황토골’로 불릴 만큼 전체 대지의 절반 이상이 황토로 덮여 있어 고구마 재배에 최적이었다. 하지만 농약을 치지 않는 김 대표는
고구마에 치명적인 굼벵이 때문에 여러 번 농사를 망쳐야 했다.
그러다 어릴 적 밭에 소금을 뿌려 해충을 없애던
기억을 떠올려 인근 바다에서 물을 길어와 밭에 뿌리는 ‘해수농법’을 자신의 고구마 밭에도 접목했다. 굼벵이를 퇴치한 것은 물론이고
바닷물 특유의 미네랄 성분이 고구마의 맛까지 높여줘 김 대표의 고구마는 전남 일대에 입소문을 타고 퍼졌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친환경 농산물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판로가 없었다. 판매량이 많지 않다 보니 남은 고구마는 창고에서 썩혀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김 대표 고구마의 우수성이 CJ오쇼핑 상품기획자에게도 전해졌다. 마침 CJ오쇼핑은
2006년부터 각 지역의 우수 농축산물을 발굴해 방송 제작비 등 상품을 판매하는 데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자사가 책임지고,
판매수익금 전액을 생산자에게 돌려주는 ‘1촌1명품’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판매자는 수익금의 2%를 농어민 발전
기금으로 기부할 뿐 CJ오쇼핑은 돈 한 푼 받지 않고 물건을 팔아준다. 2006년 프로그램 론칭 이후 지금까지 45개 농가의
200여 개 상품을 발굴해 소비자에게 소개했다.
남들은 엄청난 수수료를 떼이고도 홈쇼핑에 입점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지만 김 대표는 친환경 먹을거리로 수수료 걱정 하나 없이 지난 2년간 5억20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김 대표는
“CJ오쇼핑을 만나지 않았다면 귀농의 꿈을 접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 상생위원회 평가 “신뢰회복이 우선” ▼ 입점협의체 구성 법제화… 판매수수료 상한제 필요
동아일보 상생위원회 위원들은 유통 대기업과 중소협력업체 간 신뢰 회복이 가장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조유현 위원(중소기업중앙회 정책개발본부장)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인들 사이에서 ‘기업이 망하는 지름길은 백화점에 입점하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유통업체에 대한 불신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유통업체의 횡포를 개선하기 위해 중소협력업체들은 표준계약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 위원은 “입점업체들은 이렇다 할 계약서 한 장 주고받지 못할 정도로 자기 목소리를 못 내는 상황”이라며 “표준계약서 도입과 함께 입점업체들도 한데 모여 백화점에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입점 협의체 구성을 법제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판매수수료에도 상한제를 적용해 유통업체와 중소협력업체뿐 아니라 소비자에게도 이익이 돌아가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과도한 판매수수료는 중소협력업체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은 물론이고 소비자물가를 높이는 악덕행위라는 것. 송창석 위원(숭실대 경영학과 교수)은 “미국 일본 등 유통 선진국에서는 매장을 빌려주고 판매수수료를 받는 후진적인 유통업태가 없어진 지 오래”라며 “선진국처럼 유통업체 스스로 상품기획력을 키워 직접 상품을 구입해 판매하는 직매입 구조로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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