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만드는 중소기업 B사는 지난해 2월 대기업으로 떠나는 팀장급 연구원을 잡지 못했다. 대기업에서 연봉 30% 인상을 약속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이모 대표는 더 나은 조건을 찾아가는 게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연구원이 끝이 아니었다.
대기업으로 옮긴 연구원이 일종의 ‘스카우트 책임자’ 역할을 하면서 같은 회사 동료 5명을 더 데려간 것이다. 전체 연구원 20명 가운데 30% 가까운 6명이 6개월 사이에 빠져나간 셈이다. 당장 첨단 장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줄어 생산에 차질이 빚어졌다. 이 대표는 “LED 조명 사업이 친환경 성장동력으로 갑자기 주목받으면서 대기업들이 1000명씩 사원을 뽑는데 상당수를 중소기업에서 ‘수혈’하는 실정”이라며 “LED 장비를 다루려면 경험이 필요한데, 당장 우리도 살아야 하니까 더 작은 업체 인력들을 수소문해서 데려올까 생각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용접기를 만드는 C사는 2009년 공장 두 개 중 하나를 팔아야 했다. 2007∼2009년 3년 동안 핵심 연구원과 영업인력 등 6명이 경쟁 대기업으로 이동하면서 회사의 영업활동에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에 ‘영업방해’로 신고했지만 올 초 “자발적 이동”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C사 관계자는 “중소기업은 인력 유출이 곧 기술 유출인데도 이를 증명하기 어려워 법에 호소하지도 못한다”며 “최근 사업 구조조정을 감행할 만큼 현재까지 그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인력 빼가기에 중소기업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사회적인 인식도 한몫을 하고 있다. 대기업 프로그래머 정모 씨(35)는 최근 중소벤처회사로부터 현재의 2배 가까운 연봉 제안을 받고도 이직을 포기했다. 정 씨는 “결혼을 해야 하는데 회사 이름이 무척 중요하다”며 “아무리 대우가 좋아도 유명하지 않은 중소기업 간판으로는 결혼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중소 소프트웨어업체 대표 전모 씨(36)는 “우리 회사는 독점기술력이 있고 대우도 어지간한 대기업 수준이지만 젊은 인력들은 대기업이 부르면 대부분 간다”며 한숨을 쉬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 이런 대안 ▼ 삼성과 기술협력 제이티 “엔지니어 40% 장기근속”
유홍준 제이티 대표(55)는 뼛속부터 엔지니어다. 1990년 ‘국산 반도체 장비’를 만들어 보겠다며 혼자서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20만 원으로 사무실을 차렸다. 창업하기 전 반도체 업계에서 10여 년 동안 일하며 익힌 기술력만 믿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21년이 지난 현재 그의 회사 반도체사업부 직원은 100여 명. 이 가운데 약 70%가 유 대표 같은 엔지니어다. 기술개발 속도가 빠른 반도체사업의 특성상 엔지니어들이 회사의 중심에 있어야 시장을 선도할 수 있다는 유 대표의 생각 때문이다. 제이티는 기술 개발만 하고, 실제 생산은 외주 업체에 맡긴다. 그래서 유 대표는 제이티를 ‘기술 회사’라고 설명한다. 기술을 보유한 직원이 이 회사의 가장 큰 자산이다.
제이티가 이처럼 기술과 인재를 바탕으로 반도체 장비로만 지난해 매출액 400억 원을 거둔 배경에는 삼성전자가 있다. 11일 충남 천안시 본사에서 만난 유 대표는 “삼성전자는 세계로 나가고, 우리는 세계 수준의 제품을 만든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함께 배우고 개발해 왔다”고 말했다.
○ “협력이 핵심 인재 키우는 원동력”
제이티는 1996년 메모리 반도체가 열을 견디는지 검사하는 ‘번인 소터’를 삼성전자와 함께 공동개발에 성공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유 대표는 1997년 ‘장영실상’을 받았고, 처음으로 매출이 100억 원대에 올랐다.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세계 시장이 얼어붙었다. 경기에 민감한 반도체 회사들이 공장 가동률을 50%까지 낮췄다. 위기였다. 유 대표는 “창업 이후 처음으로 적자를 봤다”며 “바로 그때 삼성전자가 비메모리 반도체 검사장비를 개발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비메모리 반도체 장비는 생소했지만 제이티 개발자들은 삼성전자와 1년여를 매달렸다. 함께 강의도 듣고, 서로의 기술 노하우를 공유했다. 그 결과물이 한 번에 비메모리 반도체 소자 16개의 불량 여부를 선별하는 세계 최초의 ‘16파라 LSI 테스트 핸들러’다. 비메모리 장비 덕에 제이티는 올해 2분기(4∼6월) 매출액이 지난해 동기 대비 29.7% 증가한 188억 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17년째 개발업무를 맡아 온 윤운중 개발담당 이사는 “입사한 뒤부터 끊임없이 도전 과제가 주어졌다”며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인 삼성전자로부터 반도체 공정과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서로 모르는 것은 함께 배우면서 제이티의 개발진은 중소기업임에도 세계 수준의 기술을 접할 수 있었다. 배움의 기회 덕분에 많은 개발자들이 자긍심을 갖고 인재로 성장해 왔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회사 엔지니어의 40%에 해당하는 30여 명은 10년 이상 근무한 장기근속자다. 삼성전자는 공동 기술개발뿐 아니라 두 달에 한 번꼴로 리더십과 새로운 기술 트렌드 설명회 등을 열며 교육 기회를 제공했다.
○ “중기 스스로 인재 육성 노력해야”
올해 반도체 장비 사업으로 매출 500억 원, 내년 1000억 원을 목표로 하는 유 대표는 “이제 엔지니어가 아닌 경영자의 눈으로 인재를 키우는 데 집중하려 한다”며 “가만히 앉아 대기업만 보는 것은 상생이 아니다. 서로의 믿음으로 커온 만큼, 우리도 숨 가쁘게 변하는 시장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 대표는 최근 임직원 교육을 위한 강의실을 짓기 시작했다. 또 상금 1억 원을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 직원에게 주는 ‘이노베이터상’을 만들었다.
지난해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제이티의 1인당 연평균 급여액은 3500만 원 수준. 국내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의 1인당 급여액인 6200만 원과 차이가 크다. 하지만 제이티는 이런 차이를 자부심과 기술력 습득 등을 통해 극복하겠다고 다짐한다. 이상진 영업담당 이사는 “대기업에서는 분업화가 잘돼 있어 맡은 것만 배우게 되지만 중소기업에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 과정을 알게 된다”며 “어디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도전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 CEO 경영마인드 키워주는 대기업
이정훈 신흥화학 서울지소장은 올 상반기 SK의 협력업체의 실무자 교육과정인 ‘상생MDP(Management Development Program)’ 과정을 마쳤다. 바쁜 시간을 쪼개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교육을 받는 게 힘들었지만 출석률 100%로 개근상을 받았다.
이 소장은 “특히 SK증권의 프라이빗뱅커(PB)가 재테크 금융시장 상품, 펀드투자에 관해 생생한 강의를 해줬고 마케팅, 재무, 회계분야에서도 유명 교수들이 강의를 해줘 유익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대차대조표 읽는 법을 배우면서 우리 회사와 거래처의 재무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고 손익계산서, 자본변동 등 중소기업의 실무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깊이 있게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SK는 적극적으로 모든 협력업체에 ‘맞춤’ 교육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2006년부터 국내 대기업 중 처음으로 ‘SK상생아카데미’를 운용했다. 협력업체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하는 ‘상생 CEO세미나’, 협력사 핵심 부·차장을 대상으로 하는 ‘상생MDP’, 온라인 교육과정인 ‘상생 e-Learning’ 등으로 구성했다. 그동안 이 3개 과정에서 10만 명 이상의 협력업체 임직원이 교육에 참여했다. ▼ 상생위원회 평가 ▼ 청년에 투자하는 中企 ‘청색기업’ 인증해 지원
동아일보와 중소기업중앙회가 구성한 ‘대-중소기업 상생위원회’ 위원인 이장우 경북대 경영학부 교수(사진)는 대기업의 중소기업 ‘인력 빼가기’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시장 원리에 따라 우수 인력은 임금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하게 마련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중소기업의 인재를 키우기 위한 정부와 대기업의 정책적인 노력이 절실하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이 교수는 대안으로 ‘청색기업’ 제도를 제안했다. 친환경기업을 ‘녹색기업’으로 키워주듯, 청년 인재에 투자하는 중소기업을 ‘청색기업’으로 인증해 정부와 대기업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자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인재를 키우려는 유망한 중소기업에 정부가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주고, 대기업은 동반성장 관점에서 도의적으로 인력 빼가기를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공동 기술개발을 통해 중소기업의 인재를 키워 온 삼성전자와 제이티의 협력 사례도 주목할 만한 대안으로 평가했다.
일단 중소기업의 인력이 대기업으로 이동했다면 중소기업의 영업비밀까지 빼가지 않도록 법으로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 또 중소기업 스스로도 대기업과의 임금 격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교수는 “중소기업에서 능력을 펼치면 미래의 성과를 자신의 몫으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며 “스톡옵션(주식매수청구권) 제도를 중소기업이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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