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나없는 내 인생(My life without me)'이란 영화를 보고 가슴이 먹먹해졌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거지라 놀림 받고 사춘기땐 왕따였으며 17살에 첫사랑을 만나 결혼하고 허름한 콘테이너에서 무능력한 남편과 두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는 24살의 여인이 암 선고를 받고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
생활력 강한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에게조차 자신의 죽음을 숨기고 홀로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하나씩 실천해가는 장면들은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인간은 죽음을 앞둔 순간에서야 비로소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용기를 낸다. 갈등의 뿌리를 실존적 고민에서 찾는 '실존주의 심리치료'에서는 죽음에 직면할 때 개인의 삶이 얼마나 큰 변화를 겪는지 이야기하며 삶을 위해 죽음을 역이용하기도 한다.
▶ 34살 고졸 여사원, 죽음을 직면하다
SBS '여인의 향기'가 주말 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이유는 이처럼 죽음에 대한 불안과 삶에 대한 애정이 보편적이기 때문일 거다.
34살의 고졸 여사원 이연재(김선아)는 담낭암으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기까지 그저 무엇인가를 위해, 어쩌면 그저 불안 때문에 돈을 모으고 아끼고 상사의 언어폭력을 참고 참으며 한없이 위축된 채 살아간다.
그녀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사실. 죽음을 직면한 그녀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켰던 모든 행동을 180도 바꿔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원하는 일을 하나씩 실천하기로 한다.
10년 간 온 힘을 다해 일했던 회사에서 도둑으로 몰리고 상사의 폭력에 시달리던 그녀는 통쾌하게 사직서를 던지고 일본 오키나와로 생애 첫 해외여행을 떠난다. 환상의 여행지에서 꿈같은 데이트를 하고 결국 현실로 돌아와 홀로 남은 그녀가 바닷가에서 탱고를 추며 눈물 흘리는 장면은 중요한 복선이 된다.
6회에서 친구 은석(엄기준)에게 고백하는 것처럼 백발노인과 탱고를 추며 느꼈던 그 따뜻함과 편안함은 그녀를 녹인다. 연재는 비로소 삶에 대한 절박함을 토로하고 현실로 돌아와 남은 삶을 열심히 살아간다. 열정의 춤 탱고는 지금 이 순간 인간의 감각을 잘 느끼고 진정 내 모습대로 살아가려는 인간의 의지를 담은 것 같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연재는 백발노인과 탱고를 추며 느꼈던 그 따뜻함과 편안함에 눈물을 흘린다. 버킷 리스트를 만들고 야무지게 실천하는 모습은 과연 용감하고 또 아름답다. 잃었던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찾아나가는 연재를 보면 언젠가 상담 관련 워크숍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 소중한 것이었다'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던 기억이 난다. 연재의 자신감 있는 태도에, 사랑스러운 눈빛에 울컥하고 있다면 아마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욕구가 너무도 절실하기 때문이 아닐까. 현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히는 모든 것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것. 연재의 모습에서 어쩌면 대리만족을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운명을 창조하라'
시청자들 이전에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도 그녀로 인해 변한다. '실존주의 심리치료'를 쓴 얄롬은 그의 책에서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이란 작품을 자주 언급한다. 영혼이 죽은 관료자로 묘사되는 이반일리치가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후 삶의 진실에 다가가는 이야기. 신랄하고 거만했던 그는 매우 공감적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게 된다.
얄롬은 이를 '삶의 마지막 며칠 동안에 그가 평생 살았던 이전의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높은 통합의 단계를 달성했다'고 표현한다. 그 점에서 한국의료원 종양내과 의사로 실력만 있었지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던 은석은 이반일리치와 닮았다. 단, 그는 죽음을 앞둔 첫사랑 연재로 인해,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반하며 변화하는 것이 다르지만.
까칠한 은석은 '너 같은 의사에게 항암치료는 받기 싫다'라는 독설로 시작해 '대체 의미 있는 일이 뭐냐'는 신선한 충격과 '너가 있어 든든하다'는 따뜻함으로 이어지는 연재의 진실 앞에서 서서히 녹아내린다. 무표정했던 그가 웃음을 되찾는 장면들은 사랑이, 혹은 누군가의 삶 자체가 한 인간의 삶을 얼마나 크게 바꾸어 놓는 지 보여준다.
극 중 사랑에 빠지는 지욱(이동욱)과 연재. 그 누구보다 확연하게 변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연재와 사랑에 빠진 본부장 강지욱(이동욱)이다. 재벌 2세로 태어나 자라며 자신의 욕구와 상관없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그는 부족한 것이 없는 만큼 그 어떤 것에도 애정이 없어 보인다.
오키나와에서 만난 연재와 뜻하지 않은 여행을 하게 되고 '즐기라'는 그녀의 말에 자유로워지는 지욱. '당신이 만든 여행상품이 누군가에게는 생애 첫 여행이, 혹은 마지막 여행이 될 수도 있다'는 연재의 충고로 점점 자신의 일에 몰두하게 되는 그의 모습은 멋진 몸매만큼이나 매력적이다.
결국 연재와 함께 탱고를 배우고 서로의 뛰는 가슴을 느끼며 그녀에게 빠진다. 앞으로 그의 변화가 어디까지 갈 지 가장 기대가 되는 부분.
니체가 남긴 두 가지 경구는 실존주의 심리치료에서 자주 언급된다. 하나는 '살아지지 않은 삶을 남겨두지 말라'는 것. 미래를 위해 참고, 용기를 내지 못해 미루는 일들로 인해 우리가 현재의 삶을 얼마나 낭비하게 되는지, 얼마나 공허하게 흘려보내게 되는지 경고하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 얄롬은 이 말을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운명을 창조하라'는 말로 바꾼다. 상담을 하다보면 변화란 새로운 무엇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숨어 있던 어떤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라는 걸 절감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스스로의 진정한 삶을 살 권리가 있으며 그 누구에게도 타인의 삶을 좌지우지할 권리는 없다. 이 얼마나 희망적이고 동시에 두려운 진실인지. 두려움을 안고 용기 있게 뛰어드는 연재가 정말이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이계정 상담심리 전문가 lisay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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