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종 아주대병원 외상외과 교수(42)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자신의 소망이 실현된다는 소식을 기자에게서 전해 듣고도 딱딱 끊기는, 특유의 톤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라도 전국에 중증외상센터를 짓게 돼 다행이다. 앞으로 1, 2년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1월 해적에게 납치됐던 삼호주얼리호 석해균 선장을 살린 뒤 국민적 스타가 됐다. 하지만 입에선 예상 못한 지적이 쏟아졌다. 한국의 외상(外傷)환자 치료 수준은 오만보다 못하다고.
그는 호소했다. 치료를 못 받아 죽는 외상환자가 없도록 해달라고. 수천억 원짜리 대형 센터를 짓는 대신 중환자 병상 하나라도 더 늘려 달라고. 한국의 열악한 외상환자 진료 체계가 도마에 올랐다. 이 교수는 국회 토론회에서 “매년 3만 명이 중증 외상으로 숨진다. 이 중 35%는 제대로 치료를 받았다면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론을 의식한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6000억 원을 들여 중증외상센터 6곳을 짓겠다고 발표한 계획을 조속히 시행하겠다고 4월에 발표했다. 이 계획은 부처 간 협의에서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중단됐다. 100억 원짜리 20곳을 짓는다는 대안 역시 무산됐다. 다음에 나온 대안, 80억 원짜리 20곳을 짓자는 방안도 마찬가지.
아주대가 연간 10억 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외상센터 폐지를 검토하자 그는 더욱 지쳤다. “팔자 센 놈 한 명(이 교수 자신을 지칭)의 고집으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탄식했다. 고민하고 분노하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전국에 중증외상센터 15곳을 세우는 계획이 사실상 확정됐다. 복지부 관계자는 “부산대에 이미 짓고 있는 부산을 제외한 나머지 15개 시도에 하나씩 설립하기로 했다”고 18일 밝혔다. 당장 내년에 3곳을 만들고, 5년 이내에 모든 시도에 짓기로 했다.
정부는 센터별로 80억 원을 지원해 시설과 장비를 마련하도록 했다. 이 중 60억 원은 중증 외상환자 전용의 중환자실 병상 40개를 만드는 데 들어간다. 센터마다 외상외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등의 전문의 23명이 근무한다. 센터 1곳에 필요한 인건비 30억 원도 정부가 해마다 지원하기로 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기획재정부가 현재 예산을 심의하고 있지만 별다른 이견이 없다. 예산이 확정되면 9월 초부터 센터가 들어설 병원 선정 작업에 들어가겠다”고 설명했다.
시도마다 외상센터가 생기면 교통사고, 총상, 자해 등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중증 외상환자가 전문적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현재는 아주대와 서울대병원을 제외하면 중증 외상환자를 전담할 의료진이 거의 없다.
외상센터를 운영하는 아주대병원도 중환자 병상은 20개가 안 된다. 서울 주요 대학병원은 이보다 못하다. 중증외상센터 설립으로 응급수술을 받고도 중환자실 병상이 없어 응급실이나 일반 병상으로 다시 옮겨지다가 증세가 악화되는 일도 사라지게 됐다.
이 교수는 “사업 시행 초반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지 않으면 사업이 지속되지 못할 수도 있다. 제때 치료받지 못해 죽는 중증 외상환자 1만 명(연간) 중 절반은 살린다는 각오로 뛰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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