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의 차봉남 회장. 사진출처=SBS '보스를 지켜라' 공식 홈페이지
배우 '박영규'가 아니었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말보다 손이 앞설 정도로 폭력적 성향이 강한 재벌 그룹 회장과 '엄마' 소리를 남발하며 철없이 늙은 아들의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재벌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친근하게 각인시킨 것은 전적으로 배우 '박영규'의 탁월한 연기력 덕분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부하 직원들을 제압하는 '회장님'과 늙은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 하지만 결국 자기 걱정이 전부인 철없는 모습의 '아들', 그리고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자식을 위해 정성을 다 하는 자상한 모습의 '아버지'까지.
'보스를 지켜라'의 비현실적인 재벌 회장 차봉남이 웃음의 강약을 조절할 줄 아는 배우 '박영규'에 의해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친근한 캐릭터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차봉남은 "불량 재벌 길들이기 프로젝트"라는 기획 의도를 내세운 '보스를 지켜라'(권기영 극본, 손정현 연출)에서 경영에는 관심 없이 말썽을 피우는 불량아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DN그룹의 회장이다.
여고 시절 날라리라는 화려한 이력과 변변치 못한 학벌로 취업난을 겪던 노은설(최강희 분)의 4차원적인 행동에 매료돼 좀처럼 통제하기 어려운 아들이자 경영전략본부장인 차지헌(지성 분)을 보필할 비서로 전격 발탁할 만큼 화통한 성격의 차봉남은 실제 현실에서 쉽게 전해 듣지 못했던 유형의 재벌 그룹 회장 이미지로 차별화되어 있다.
SBS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의 차봉남 회장. 사진출처=SBS '보스를 지켜라' 공식 홈페이지 재벌 회장으로서의 품위와 격식은 아랑곳없이 상습적으로 폭행을 남발하는 차봉남의 캐릭터가 과장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행동만큼은 매스컴에서 보도되었던 일부 재벌가의 불법과 탈법 행태와 상당히 유사하다.
노은설과의 악연 때문에 폭력 사건에 연루된 아들 차지헌을 위해 직접 완력을 행사하다가 언론에 노출되어 검찰의 소환을 받자 휠체어를 타고 출두하는 차봉남의 모습은 조직폭력배를 동원한 재벌 회장의 보복 폭행과 비리에 연루된 그룹 총수의 검찰 출두 장면을 연상시킨다.
또한 차봉남이 먼저 세상을 떠난 형님의 부인, 즉 형수님과 그룹의 경영권 승계 문제로 갈등을 벌이는 극적 상황에서 이미 오래 전 매스컴을 들썩이게 했던 모 재벌 그룹의 경영권 분쟁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하나 뿐인 아들에게 그룹의 경영권을 넘겨주기 위해 온갖 불법과 탈법을 일삼는 차봉남의 행동 역시 오랜 법정 공방 끝에 실형을 선고받은 모 재벌 그룹의 경영권 승계 과정과 닮아 있다. 이쯤 되면, 차봉남은 막대한 자본력으로 무소불위의 경제 권력을 행사하는 한국 재벌 그룹 일가의 일그러진 이면을 종합적으로 풍자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걸핏하면 '쪼인트'를 날리는 다혈질로 여타의 드라마에서 보기 어려운 재벌 회장 차봉남이 다방면에 걸쳐 풍자되는 과정에서 인간적 면모가 도드라진다는 것이다. 하나 뿐인 아들은 그에게 '꼰대'라는 비속어를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DN그룹의 기반을 닦았던 어머니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못 마땅해 한다.
SBS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의 차봉남 회장. 사진출처=SBS '보스를 지켜라' 공식 홈페이지 게다가 아들의 비서에게는 "휠체어 타지 말고, 직원들 뺑이 치게 하지 않는" 좋은 회장님의 반면교사로 인식되고, 급기야 사회봉사활동 중에 소년원생들로부터 '깡패회장'이라며 놀림당하는 수모까지 겪는다.
가족과 회사 그리고 사회에서 차봉남이 겪는 수모는 모두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이는 곧 그의 인간적 면모를 돋보이게 하는 극적 상황이 된다.
자상한 말 한 마디에 앞서 소리부터 질러 아들의 기를 죽이고 어머니의 눈을 피해 그룹의 비자금을 별도로 관리하며 직원들을 닦달하는 그의 행동은 대부분 공황장애를 겪는 아들에 대한 측은함에서 비롯한 것이다.
소년원에서 사회봉사활동을 하다가 수모를 겪는 것 역시 아들을 위해 행사한 폭행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탈법과 불법을 일삼는 부도덕한 재벌 회장으로서 극단적으로 희화화되는 차봉남을 마냥 비난하기 어려운 것은 그에게서 투박한 방식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차봉남에게는 결단력 있는 재벌 그룹 회장, 철없이 늙은 아들, 자식을 생각하는 자상한 아버지의 면모가 삼투압 돼 있지만, 그는 극적 상황의 전개 양상에 맞춰 단순 소비되기 쉬운 인물이다.
청춘남녀의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로맨틱 코미디에서 차봉남은 '아버지' 또는 '회장'으로서 그저 주인공의 갈등을 유발하거나 극적 긴장을 이완시키는 감초 역할에 머무르기 쉬운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역할에 머물렀을지도 모르는 DN그룹 회장 차봉남이 정극과 코미디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능수능란한 연기를 과시하는 배우 박영규를 통해 구체화되면서 그는 드라마의 색깔과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박영규의 탁월한 연기력이 재벌 회장에 대한 현실 인식의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불법적인 경영권 승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노은설에게 "양심적인 회장님!"이란 말을 듣고 "가슴이 찔린다."라는 심경을 밝히는 차봉남의 행위는 이율배반적이면서도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에 대한 인식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 과장되게 표현되면서 만들어내는 웃음은 차봉남의 인간적인 면모를 돋보이게 만든다. 여기에 양로원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세탁을 하는가 하면 잡초 제거와 도배 그리고 교통정리에 이어 유아원에서 둘리인형을 뒤집어쓰고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그의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 그는 폭력과 불법을 일삼는 재벌 회장의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인간적 면모가 돋보이는 자상한 아버지로 변신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SBS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의 차봉남 회장. 사진출처=SBS \'보스를 지켜라\' 공식 홈페이지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재벌가의 불법과 탈법 행태를 극단적으로 희화화시킨 차봉남을 향해 연민과 공감의 시선이 형성되는 순간, 그는 도덕과 양심은 물론 사회 정의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개연성이 농후한 인물로 사회적으로 경계해야 할 인물이 된다.
불법과 탈법으로 그룹을 경영하는 차봉남의 행위가 아무리 자식을 위하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회적 지탄의 대상인 것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기 위해 불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사건으로 차봉남이 법정형을 선고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설령 차봉남이 아들을 사랑하는 노은설의 설득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검찰에 자진 출두하려 했다 해도 그의 불법과 탈법 행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간을 찌푸린 채 때로는 옹알거리고 때로는 투덜거리면서 대사를 던지며 연기하는 배우 박영규에 의해 구체화된 재벌 그룹 회장 차봉남은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극단적으로 희화화된 '차봉남 회장'이 통쾌한 풍자의 대상이면서도 결코 미워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적 면모가 돋보이는 캐릭터로 주목받는 것도 그래서이다.
불법 비자금 사건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는 상황에서조차 인권 유린 운운하며 "잠 좀 자자!"라고 호소하면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신고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차봉남 회장은 여전히 미워할 수 없는, 심지어 사랑스럽기까지 한 캐릭터이다.
만약 불법과 탈법을 일삼는 재벌가의 행태에 대한 비판적이고 문제적인 시선을 견지할 수만 있다면, 차봉남 회장이 던져주는 웃음을 마음껏 즐겨도 되지 않을까?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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