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사건’ 전격 재수사]‘도가니’ 폭로 3인 “양심 시효는 안끝났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29일 03시 00분


광주인화학교 성폭행 밝힌 조규남-전응섭-김용목 씨 “처벌약속 못지켜 마음의 빚”

경찰, 재수사 전격 착수

이들이 없었다면 여리고 말 못하는 아이들은 여전히 눈물로 학교를 다녀야 했을 것이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여전히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음침하고 추악한 사건을 용감하게 세상에 드러낸 사람들. 조규남(48·당시 인화학교 학생 어머니), 전응섭 씨(49·인화원 교사), 김용목 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 대표(49·목사). 그들의 용기와 노력이 있었기에 가장 소외받고 약한 이들의 아픔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2005년 6월 중순 조 씨는 광주 인화학교에 다니는 딸(당시 13세)에게서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을 들었다. 학교 안에 ‘또래 친구인 A 양이 행정실장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 조 씨는 처음에는 학생들 장난으로 치부했지만 너무 진지하고 간곡한 딸의 말에 사실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확인 결과 학생들의 말은 모두 같았다.

조 씨는 직접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인화학교 기숙사인 인화원에서 A 양을 빼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A 양의 할머니와 기숙사 보육교사이자 청각장애인인 전응섭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직원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A 양은 모든 사람을 두려워했고 처음에는 신고는 물론이고 상담 자체를 기피했다. 하지만 조 씨는 A 양의 손을 굳게 잡고 “죄를 지은 자들이 반드시 처벌받게 하겠다”고 약속해 승낙을 얻었다. 조 씨와 A 양은 같은 달 22일 학교 밖에서 전 교사를 만나 광주 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를 찾아 신고했다. 추악한 사건이 외부에 처음 드러난 것이다.

신고 이후 충격적인 교직원들의 장애아동 성폭행 사건에 광주지역 전체가 들끓었다.  
 ▼ “가해교사-재단 뉘우침 없어… 피해학생 보면 가슴 미어져” ▼

같은 해 7월에는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 26곳이 참여한 ‘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원회’가 결성돼 공동 대응에 나섰다. 김용목 대표는 “조 씨와 전 교사의 용기 있는 행동이 없었다면 진실이 영원히 묻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조 씨 등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화학교 김모 교장(2009년 9월 사망), 행정실장 김모 씨(63), 교사 전모 씨 등 6명은 청각·지체장애 학생 9명을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았다. 이들에 대한 최종 형량은 실형 2명, 집행유예 2명, 공소시효 소멸에 따른 공소기각과 불기소 2명 등이었다. 판결이 나오자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사건에 연루된 교사 1명은 학교로 복직까지 했다.

김 대표는 “가해자들의 공소시효는 지났지만 양심의 시효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며 “가해 교사나 재단 측은 아직도 뉘우치지 않고 ‘뒤늦게 왜 이러느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조 씨를 도운 전 교사의 고통도 컸다. 한솥밥을 먹던 가해 교직원들과 재판정에서 얼굴을 맞대야 하는 힘겨운 상황이 지속된 것. 인화학교는 결국 전 교사를 2006년 해직했고 전 교사는 성폭행 사건 외에 자신의 복직 소송도 진행해야 했다. 복직 소송에서 이긴 그는 현재 인화근로시설 지도교사로 일하고 있다. 전 교사는 동아일보의 인터뷰 요청을 끝내 고사했다.

1960년 설립된 인화학교는 성폭력 사건 발생 직전 장애우 78명이 생활했지만 현재는 22명만 있다. A 양 등 당시 인화학교 재학생 18명은 사건 신고 후 가해 교직원 처벌을 요구하다 학교에서 쫓겨나 다른 시설로 흩어졌다. 또 당시 양심선언을 한 인화학교 교사 15명 가운데 11명도 교직을 떠났다.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조 씨는 지난달 광주 모 방송국에서 열린 청각장애인 후원행사에서 오랜만에 A 양을 만났다. 조 씨는 “A 양에게 약속한 가해교사 처벌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정말 미안했는데 오랜만에 만난 A 양이 해맑게 웃어 가슴이 더욱 미어졌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편 영화 ‘도가니’의 소재가 된 광주 인화학교 원생 성폭력 사건에 대해 경찰이 전격 재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청은 28일 “본청 지능범죄수사팀 요원 5명 등 15명으로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관련 의혹을 모두 해소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은 우선 인화학교 행정실장 김 씨 등 사법 처리를 받은 4명과 가해자로 지목됐지만 처벌을 받지 않은 교직원 6명의 혐의를 다시 수사해 여죄를 캐기로 했다. 또 경찰은 인화학교 원생들 사이에서도 성폭행이 있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피해 사례를 추가로 찾고 있다.

경찰은 교내 성폭행이 5년 넘게 드러나지 않았고 사건이 불거진 후에도 학교 측이 피해자들에게 합의를 종용하는 등 사건을 축소한 의혹이 있어 당시 조사 경찰관과 학교 측의 유착 여부, 교육청 등 관계 당국의 감독 소홀 문제도 파헤칠 계획이다. 교육과학기술부도 기숙사가 설치된 전국 41개 특수학교를 대상으로 다음 달 장애 학생 생활실태를 점검할 방침이다.

한편 이 사건의 항소심 재판을 맡았던 이한주 서울고법 부장판사(55·사법시험 25회)는 28일 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위로의 뜻을 밝혔다. 이 부장판사는 “법률적 판단의 정당성을 떠나 이 판결로 소수 약자가 큰 고통을 받은 점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가슴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광주고법과 광주지검은 보도자료를 내고 “영화에서 가해자를 감싼 것으로 그려진 것 등 실제와 다른 내용이 많다”고 밝혔다.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인화학교 ::

사회복지법인 ‘우석’이 1960년 광주 광산구에 세운 청각장애 특수학교. 한때 학생 수가 100명을 넘었을 정도로 광주 최대의 장애인 교육시설로 손꼽혔다. 2000년부터 5년간 이 학교에서 발생한 성폭력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 ‘도가니’가 최근 흥행하면서 가해자들이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었던 사법 시스템에 대한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  

▲동영상=아동 성폭력 고발...영화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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