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이야기]<88>생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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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7일 03시 00분


한국인의 ‘생선회 사랑’ 각별…조상 대대로 즐겨

사람들은 생선회가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알고 있다. 섬나라에서 물고기를 날로 먹던 습관이 생선회로 발전해 다른 나라로 퍼졌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상식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식과는 달리 일본 생선회의 역사는 짧다.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 중에서 가장 늦다.

생선회를 뜻하는 사시미(さしみ)가 일본 문헌에 보이는 것은 1399년이다. 조선에서는 제2대 임금인 정종이 즉위하던 해다. ‘영록가기(鈴鹿家記)’라는 요리책에 잉어회 뜨는 법을 설명하면서 처음 사용했다. 1489년의 ‘사조류포정서(四條流包丁書)’에는 꿩이나 산새를 잡아 소금에 절여 얇게 썬 것도 사시미라고 했다. 생선회와 육회의 구분조차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랬던 일본에서 생선회가 퍼진 것은 임진왜란 직후인 에도시대부터다. 이전까지 일본의 중심지는 일왕이 살던 내륙의 교토였다. 당시는 바다가 멀어 신선한 횟감을 얻지 못해 생선회가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다 막부를 바닷가인 도쿄로 옮기면서 일본인의 식탁에서 생선회의 비중이 높아졌다.

우리는 일본 영향으로 회를 먹게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일본 문헌에 사시미라는 단어가 보이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생선회를 즐겨 먹었다.

고려 중기의 이규보는 “붉은 생선회를 안주삼아/반병 술 기울이니 벌써 취한다”고 읊었고 고려 말의 목은 이색도 “물고기 잡아 눈발처럼 잘게 회를 쳤다”고 노래했다. 조선 초기 서거정은 “서리 내린 강가의 통통 살찐 붕어/휘두른 칼에 하얀 살점 흩날리니/젓가락 놓을 줄 몰라라/접시가 이내 텅 비었네”라고 했다.

홍만선은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생선회를 먹은 후 소화가 안 될 때 생강즙을 먹으면 바로 소화가 된다고 치료법을 적었다. 생선회를 먹고 체했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는 증거다. 한국인의 생선회 사랑은 일본의 영향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이어진 식습관이며 음식문화였던 것이다.

반면 중국의 생선회는 수수께끼다. 일찍이 생선회가 발달했던 곳은 중국이다. 춘추전국 시대의 ‘시경(詩經)’에 구운 자라와 생선회 이야기가 나오고 ‘예기(禮記)’에도 봄에는 파, 가을에는 겨자를 곁들여 회를 먹는다고 했다. 공자도 ‘논어(論語)’에서 장(醬)이 없으면 회를 먹지 않는다고 했으니 당시 상류사회의 일반적인 음식이었다. ‘맹자(孟子)’에 실린 ‘인구에 회자(膾炙)된다’는 말의 회자는 날생선과 구운 고기라는 뜻이니 그만큼 회를 많이 먹었다는 이야기다.

당송(唐宋) 때도 생선회를 즐겼다. 소동파는 생선회를 주제로 13편의 시를 썼고 육유(陸游)라는 시인은 27편을 남겼다. 이후 원나라 황실의 요리책인 ‘음선정요(飮膳正要)’에도 생선회가 나온다.

이런 생선회가 명나라 중반 이후 갑자기 사라진다. 조선 중기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병사가 조선 사람이 회 먹는 것을 보고 물고기를 날로 먹는 오랑캐라며 비웃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미 생선회를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실제 명청(明淸) 때 문헌에는 생선회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현대 중국요리에도 생선회는 거의 없다. 명나라 때 생선회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전염병 설이 있지만 이유는 미스터리다. 일본 사시미의 역사가 짧다는 것만큼이나 의외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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