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박상민의 ‘소프트’한국]④세상을 바꾸는 ‘잉여인’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17일 16시 56분


●미국의 '너드' 일본의 '오타쿠' 한국의 '잉여인'이 세상을 바꾼다
●실리콘 밸리의 핵심은 돈이 아닌 '제멋대로 개발자'

애플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영악한 스티브 잡스이지만 실제 기술을 갖고 PC를 만든 사람은 '너드' 워즈니악이었다. 워즈니악이야 말로 "실리콘밸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애플컴퓨터를 들고 있는 스티브 워즈니악(사진).
애플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영악한 스티브 잡스이지만 실제 기술을 갖고 PC를 만든 사람은 '너드' 워즈니악이었다. 워즈니악이야 말로 "실리콘밸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애플컴퓨터를 들고 있는 스티브 워즈니악(사진).
오늘은 미국에 오랫동안 살면서 관찰한 '잉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한때 유행한 일본 드라마 캐릭터에서 따온 '오타쿠'라는 말로 농담처럼 통칭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에서는 이들을 '너드(Nerd)'라 부른다. 짧게 설명하면 컴퓨터나 취미생활에 푹 빠져서 다소 비사회적인 모습까지도 보이는 사람들을 말한다.

한국에도 '너드인'이 분명 존재한다. 여기 미국의 너드란 사회가 자유로운 영향인지 마음껏 DNA에 새겨진 너드 향기를 풍기며 살아갈 수 있다. 신기하게도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취향에 이끌려 상대방 또한 너드가 되어 가는 것을 발견할 때도 많다.

완전히 너드인으로 감염되기 전에 어서 필자의 발견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문득 든다. 우선 영어사전에 실린 '너드(Nerd)'의 정의를 살펴보자.

①멍청하고, 쓸모없고, 매력 없는 사람

②똑똑하지만 비사회적인 취미나 이상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

멍청한 사람은 물론이고 똑똑한 사람도 '너드'라는 정의가 흥미롭다. 미묘하게 두 반의어 사이를 오가는 인종을 너드인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 본격적으로 너드의 코드를 분석해 보자.

미국의 너드라면 패션센스가 부족한 게 상식이다. 필자 역시 한국에 갈 때마다 한 가지 스트레스가 있다. 집에서 나름대로 제일 깨끗한 옷으로 차려입고 비행기에서 내려도,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너무 속상해하신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거지온줄 알았다고 하셨을 정도다.

하루, 이틀 여행가방에 넣어온 옷들, 주로 검은 티셔츠와 갭 상표의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면 결국 이웃들 보기 부끄러우신지 내 손을 이끌고 소위 '브랜드' 옷가게로 향하셨다. 몸에 착 달라붙는 그 옷들을 한국에서만 간신히 입었지만 미국에서는 금세 나만의 드레스코드로 돌아가곤 했다.

그렇다면 너드의 드레스 코드, 그 기준은 무엇일까? KBS개그콘서트의 '애정남' 코너가 화제인데 개그맨 최효종처럼 필자도 이 자리에서 애매한 기준을 정해드리겠다.

▶C급 너드: 면바지 + '카라' 있는 옷 (폴로 티셔츠나 남방)
▶B급 너드: 청바지 + '카라' 없는 티셔츠
▶A급 너드: 반바지 + 공짜 티셔츠 (주로 회사들이 주는 홍보용) + 샌들
▶S급 너드: 반바지 + 공짜 티셔츠 + 샌들 + 양말 (흰색이 최고)

여기에 예외는 없다. 내가 수년간 관찰한 결과이기도 하고, 리눅스를 만든 리누스 토발즈가 그의 자서전에서 밝히기도 한 그의 드레스 코드다.

S급 너드 리누스 토발즈와 그가 신고 있는 흰 양말.
S급 너드 리누스 토발즈와 그가 신고 있는 흰 양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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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천재 개발자도 여지없이 '너드 패션'


약 두 달 전쯤 필자가 다니는 회사에 유명한 개발자 제임스 고슬링이 놀러온 적이 있다(그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자바 언어를 만들었다).

필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분은 반바지, 공짜 티셔츠, 샌들에 양말을 정확히 착용하고 계셨다. 우리 회사에선 마케팅 차원에서 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가장 싼(!) 티셔츠를 선물했고, 티셔츠의 로고를 한참이나 흐뭇하게 바라보며 좋다고 하던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우리 회사의 개발팀 막내는 작년 막 대학을 졸업한 23살의 '개럿'이다. 이 친구가 저 멀리 타주에서 인터뷰 하러 온 날, 나와 동료들은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결론을 내렸다:

"인물이다. 뽑자!"

두 뺨을 살포시 덮는 꼬불꼬불한 금발, 여드름이 가시지 않은 희고 큰 얼굴에 두툼한 안경을 낀 그 녀석의 호기심 가득한 얼굴은 동화 속에서 막 뛰어 나온 것 같은 '너드나라 어린왕자'였다. 깔끔해 보이려고 입은 흰 남방은 면접을 위해 엄마가 정성껏 골라준 옷이었다는 사실을 모두 직감했다.

그의 패션센스는 반바지에 매달고 다니는 알루미늄 물통에서 절정을 이룬다. 회사에 들어온 후 우리의 예상대로 그는 실력에서도 최고였다. 개발팀에서 가장 어리고, 팀 절반은 박사들이지만 그의 소프트웨어 패키징 능력은 팀의 그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다.

자바의 개발자인 제임스 고슬링. 공짜 티셔츠를 착용한 그는 전형적인 실리콘밸리 공식 '너드'다.
자바의 개발자인 제임스 고슬링. 공짜 티셔츠를 착용한 그는 전형적인 실리콘밸리 공식 '너드'다.

■너드의 생활 코드 3가지

너드들과 어울려 생활하다 보면 묘하게 발견되는 대화와 인간관계, 그리고 취미의 공통점이 있다.

▶①마음 여린 독설가

경험상 성격이 유순하고 두루 두루 사람들과 잘 지내는 '뛰어난 프로그래머'란 드물다. 뛰어나고 감각적인 코더들은 종종 성격이 거칠거나, 대화의 기술이 부족해서 표현이 아주 직설적이다. 이를테면 우리 회사의 개발회의는 종종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간다.

⇒ CTO(약 50세)¤"얘들아 우리 경쟁회사가 A라는 기능을 새로 추가했단다. 우리도 그 기능을 만들어볼까?"
⇒ 필자(순한 33세)¤"오 좋은 아이디어예요. 저도 그런 거 생각했어요"
⇒ 개발자 A(32세)¤"오 마이 갓 XXX(욕). 코딩도 제대로 못하는 OO들이 만든 것을 따라하라고?(계속 욕)"

회의 중에 상스런 표현을 이렇게 흔하게 접한다. 회사에 32세의 '닐' 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는 욕쟁이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까만 구렛나루는 물론이고 운동까지 열심히 해서 몸도 근육질인데 이 친구는 회의할 때면 종종 흥분해서 욕을 내뱉는다.

개발팀엔 50대 아저씨들도 있고 CTO는 자신의 예전 지도교수인데도 욕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사실 표현이 거칠어서 그렇지 대부분 맞는 이야기를 한다. 약간은 어색한 가운데 회의가 끝나면 '닐'은 이런 사진을 모두에게 보내곤 한다.

그렇다. 그는 험상궂은 얼굴에 욕을 달고 살아도 마음만은 고양이 사진을 좋아하는 여린 청년인 것이다!

대부분 너드들은 이처럼 마음이 여리고 착하다. 뛰어난 화술과 감정을 숨길 줄 아는 기술은 부족해도, 그래서 종종 친구들이 없고 외로워 보여도, 내가 만난 진짜 너드들은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다.

소프트웨어 회사의 진정한 힘은 경영대학(MBA) 출신에 서글서글 사교성 좋은 사람들보다, 이렇게 거칠지만 마음 여린 개발자들이 바로 너드들이다.

▶②잉여력 폭발

폭발하는 잉여력역시 너드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회사에서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너드들은 종종 밤을 지새우고 심혈을 기울여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 내곤 한다. 그리고 그 작품에 다들 감탄하지만, 누구나 곧 이 의문을 갖게 된다. "근데 왜 했을까?"

예를 들어 '앤드류'라고 주말에도 회사에서 사는 젊은 너드가 최근 액셀 파일을 하나 만들었는데, 실시간으로 회사의 서버 정보들을 취합하는 매크로를 사용해 대단한 그래프를 선보였다. 너무 멋졌다. 근데 왜 한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미 그 기능을 하는 웹페이지가 있었는데 말이다.

▶③'호기심', 너드의 필수 인생 코드

너드의 인생은 호기심으로 충만해 있다다. 재미있는 장난감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고, 새로 나온 기계에는 흥분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 회사 사무실엔 장난감 헬리콥터가 날아다니고 모형 기차가 비좁은 개발실 가운데에서 빙글빙글 돌아간다.

고등학생 아들이 있는 엔지니어 아저씨 '데이빗'은 어느날 흥분하며 로봇 프로그래밍을 해보자고 제안한다(회사의 비지니스와 무관했다). 그의 입사를 환영하는 회식은 비좁은 사무실에서 시켜먹은 인도 카레와, 그가 들고온 X-box 게임이 전부였다.

너드는 자신이 꿈꾸는 비전을 향해 코딩을 멈추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그 열망은 강해지는듯 보인다. 우리 개발팀 최고 노장 아저씨 '밋치'는 나이로는 50을 넘겼다. 하지만 우리 개발팀 중에 그가 제일 유명하고 실력도 최고다.

구글을 포함 수만 명이 그가 만든 아마존 클라우드 라이브러리를 사용한다. 아저씨는 낮에는 회사일로, 밤과 주말에는 사람들이 보내온 패치를 적용하고 코딩하느라 정신이 없다 (무보수로 일한다).

필자가 근무중인 회사의 창업자이자 CTO인 '리치'역시 비슷한 연배의 대학 정교수다. '리치'는 개발팀 사람들 중 매일 아침 가장 일찍 출근해 코딩한다. 노트북 스크린을 뚫어버릴듯 집중하며 키보드를 두들겨대다가, 밝게 웃으며 느지막이 출근하는 우리들을 맞는다.

CTO 역할은 좀 더 높은 자리에서 회사의 비전과 경영을 논해야 하지만, 그는 여전히 버그를 잡으려 디버거를 돌리고 시스템을 테스트할 스크립트 짜기에 여념이 없다. 출장길 공항에서도 그는 서버에 접속해 시스템을 점검한다.

"너드: 똑똑하지만 비사회적인 취미나 이상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그 이상이 세상을 바꾼다.

화려한 실리콘밸리의 겉모습은 진짜 모습이 아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에 미친 허름한 개발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진짜 주인공들이다. 애플스토어 밖에 자판키 여러 개가 없어진 구형 애플 컴퓨터의 키보드가 놓여 있다. 뉴욕=신화통신 연합뉴스
화려한 실리콘밸리의 겉모습은 진짜 모습이 아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에 미친 허름한 개발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진짜 주인공들이다. 애플스토어 밖에 자판키 여러 개가 없어진 구형 애플 컴퓨터의 키보드가 놓여 있다. 뉴욕=신화통신 연합뉴스

■한국의 너드는 도대체 어디에?

우리 가운데엔 어떤 종류의 너드들이 있을까 의문이다. 패션감각이 제로인 사람들은 어디서든 찾을 수 있으니 패션은 OK다. 유명한 인터넷 사이트 등을 가보면 범람하는 잉여를 찾을 수 있으니 그것도 OK다. 그런데 소프트웨어산업과 문화엔 정말 호기심과 비전이 있을까?

소프트웨어를 창조하는 재미보다는 생계를 위해 허겁지겁 실리콘밸리를 쫓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 그마저 30대 후반엔 이미 정년이 찼다고 자리를 비우게 하는 회사들이 우리 IT산업의 중심에 있다.

뛰어난 잠재적 해커들이 공무원 시험과 의학대학원에 매진하게끔 만드는 사회 전반의 불안함과 공포, 그리고 그 가운데 컴퓨터와 공학능력이 뛰어나면, 너드보다 박사, 교수님, 연구원으로 사회 지도층에 올라서야 한다고 강요하는 21세기 봉건사회가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되돌아봐야 한다.

50세가 넘어서도 즐겁게 코딩하고 생계와 상관없는 프로젝트에 순수한 재미와 세상을 바꾸는 비전으로 뛰어드는 잉여인들, 실리콘밸리의 중심에 그들이 있음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한다.

박상민 IT칼럼니스트 | twitter.com/sm_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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