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려는 내 아기를 그들은 비닐에 담아 버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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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 207명 “1960, 70년대 강제낙태 피해” 국가상대 소송

흔히 ‘문둥이’라는 속칭으로 불려온 한센병 환자들은 한때 2세를 갖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살갗에서 진물이 흐르고 손발이 굳는 부모의 천형을 후대에 물려준다는 편견 때문이었다. 1950년대 초 한센병은 유전되지 않고 완치가 가능하다는 게 널리 알려진 뒤에도 정부는 30년 가까이 그 편견을 버리지 않았다.

○ 한센인 부부들의 처참한 투쟁

한센인 김모 씨(75·여)는 50여 년 전 한 간호사가 했던 말이 아직 생생하다고 했다. “이제 봤으니 됐지요?” 간호사는 김 씨 배에서 막 나온 아기를 들어올려 그에게 보여주며 그렇게 말했다. 인공유산으로 예정보다 2개월 일찍 나온 사내아이였다. 김 씨는 “숨을 쉬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기를 간호사가 비닐봉지에 담아 옆방으로 가져갔다”고 말했다. 한센인들 사이에선 그렇게 아기의 생명을 빼앗기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수용소 안에서 환자끼리 결혼은 가능하지만 남자는 불임수술을 받게 했다. 여자는 임신하면 강제로 낙태를 시켰다.

경북 안동시에 있는 한센인 시설에서 살았던 박모 씨(66·여)도 18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당시의 끔찍했던 기억을 증언했다. 1964년 여름, 임신 8개월이었던 박 씨는 배가 불러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붕대로 배를 동여매고 다니다 결국 직원들에게 발각됐다. 태아를 없애지 않으면 밥을 안 주고 시설에서도 쫓아낸다는 얘기에 박 씨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시설을 나가면 사회의 저주스러운 냉대는 차치하고라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박 씨는 결국 울산의 한 불법시술업체를 찾아 조산제를 먹고 이튿날 출산했다. 박 씨는 “애가 용케 살아서 나왔는데 시술업체에서 ‘우리가 처리할 순 없고 알아서 버리고 오라’고 해 근처 갈대밭에 가 아기를 버렸다”며 울먹였다.

일부 여성 한센인들은 몰래 아기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낙태보다 더 쓰라린 이별을 강요당해야 했다. 강모 씨(68·여)는 1972년 초 첫 아기를 강제 낙태당한 뒤 몰래 둘째를 임신했다. 시설 측 눈을 피해 인근 시장에서 출산했지만 아기를 몇 시간도 옆에 두지 못하고 보육원에 보냈다. 강 씨는 며칠 뒤 출산 사실이 알려지는 바람에 임신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수술을 받았다.

○ 국가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

강제 낙태와 정관수술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한센인 207명은 18일 과거 한센인 정착촌에서 벌어진 피해를 배상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소송을 대리한 한센인권변호인단은 “강제 정관수술 피해자 190명에게 각 3000만 원, 낙태 피해자 17명에게 각 5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촉구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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