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부산일보 연재한 ‘녹지대’ 내년 1월 출간
1960년대 전쟁후 서울 명동 음악다방 배경… 추리적 요소 곁들인 연애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2008)가 서른여덟의 나이에 집필했던 장편소설 ‘녹지대(綠地帶)’가 탈고 47년 만인 내년 1월 책으로 나온다. 부산일보에 1964년 6월 1일∼1965년 4월 30일 연재됐던 이 작품은 박경리의 작품 연표 등을 통해 제목만 알려져 있었을 뿐 학계에는 내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소설은 1960년대 서울 명동의 음악다방 ‘녹지대’를 배경으로 시인, 조각가 등 예술가들의 사랑 얘기를 다뤘다. 당시의 시대상은 거의 다루지 않고 불륜, 배신 등의 치정(癡情)을 그리는 데 집중한 통속적 연애소설이다. 한국인의 수난사를 넉넉하고 푸근한 마음으로 그렸던 ‘토지’와는 전혀 다른 작가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그동안 박경리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대표작인 ‘토지’에 집중됐고, 범위를 넓힌다고 해도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 몇 작품에 그쳤다. ‘녹지대’처럼 신문에 연재된 작품은 통속적이라는 이유로 학계가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1963년 전남일보에 연재됐던 ‘그 형제의 연인들’도 책으로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녹지대’는 2008년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김은경 KAIST 강사가 당시 신문을 일일이 살펴 자료를 모았고, 이를 출판사 북폴리오가 교정 편집해 책으로 나오게 됐다. 6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전쟁고아로 자라나 시인을 꿈꾸는 여주인공 하인애는 시화전을 준비하다 만난 김정현을 첫눈에 반해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김정현은 유부녀인 ‘그 여자’(이름이 나오지 않는다)와 불륜의 관계. 하인애는 ‘그 여자’에게 협박을 당하고, ‘그 여자’의 남편인 조각가 민상건으로부터 김정현이 자신의 육촌동생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는다.
불륜과 삼각관계, 그리고 근친상간까지 펼쳐지는 이 소설에는 미스터리 요소도 가미돼 있다. 김정현이 과거 과실치사로 친구를 죽였으며 ‘그 여자’가 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라는 것. 김정현이 홀연히 행방을 감추면서 하인애가 그를 찾아가는 과정도 나온다.
박경리의 딸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은 “녹지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출판을 결정하신 작품이다. 생전 추리소설을 즐겨 읽으셨던 어머니는 이 작품에 추리적 요소를 많이 가미하셨다”고 말했다.
작품은 김정현을 향한 하인애의 순종적인 사랑과 ‘그 여자’의 편집증적인 사랑을 대비시키며 흡인력을 높인다. 하인애의 친구 윤은자 또한 두 남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등 음악다방 ‘녹지대’를 배경으로 엇갈린 사랑의 모습을 다양하게 조명했다.
김은경 강사는 “녹지대에서 나타난 치열하거나 유연한 사랑은 박경리 문학의 ‘원숙함’이 ‘젊음’과 함께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다”며 “주로 ‘미망인’으로 대표되는 6·25전쟁 1세대가 아니라 6·25 2세대 청춘들의 자유로운 꿈과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다르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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