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과 산업화 시기를 거쳐 이제는 권력이 독점되는 대통령 중심제보다는 민주화와 지역감정 극복을 위해 내각책임제가 필요합니다. 개헌해야 합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조계종 총무원을 방문한 당시 김종필(JP) 자민련 총재는 자리에 앉자마자 특유의 소신을 피력했다. 미묘한 시점이었다.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DJ)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대권을 두고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이른바 ‘DJP 연합’은 나중 일이었다. 어쨌든 이 시기 JP는 내각제 개헌을 요구하며 세를 모으고 있었다.
그때 내 답변은 이랬다.
“조계종 역시 종정 중심제와 총무원장 중심제를 둘러싼 오랜 갈등 때문에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종정이 상징적 존재가 아니라 직접 권한을 행사할 때의 폐해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김 총재의 취지에 공감합니다.”
JP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는 총무원 방문에 앞서 준비해 달라고 요청한 지필묵을 찾았다. 그러더니 붓을 잡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짓는다)라고 단숨에 써 내려갔다. “스님, 불교는 일체유심조입니다”라며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조금 뒤 JP를 수행했던 김용채 씨가 다시 찾아왔다. 원장 스님이 내각책임제에 찬성한다는 내용의 성명에 이름을 넣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속으로 ‘아뿔싸’ 했다. 정치제도로서의 내각책임제가 장점이 있고 개인적 판단에서 공감한다는 것과 종단 대표의 공개적 지지는 차원이 달랐다. 이런 뜻을 밝히자 김 씨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는 5·16 군사쿠데타와 유신체제의 한 정점으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또 다른 이미지는 킹메이커이자 만년 2인자 아닐까. JP는 ‘모 아니면 도’ 식의 정면대결은 피했다. 절호의 기회 또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시류를 거스르기보다는 긍정적으로 인정하면서 자신의 뜻을 펼쳤다.
내 기준으로 볼 때 JP는 DJ와 김영삼(YS) 전 대통령 등 당대의 정치인들과는 좀 달랐다. 풍류(風流)? 이 표현이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는 박식하고 유머와 여유, 예술적 끼가 있었다. 1990년대 중반 경실련 공동대표로 한국은행 민영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4당 대표를 면담했다. 그때 JP는 “스님, 예고도 없이 이렇게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느냐”면서도 반갑게 맞이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30대 때 부여에서 그의 자취를 만난 적이 있다. 지금은 그 자리에서 철거됐지만 부여에 가면 계백장군 동상이 있었다. JP는 동상의 기록에 ‘백제의 역사를 최후로 빛낸 위대한 충신’이라고 썼다. JP는 젊은 시절 백제권의 소외감을 느꼈던 것 아닌가 싶다. 그가 부여에 오면 단골로 묵었다는 부여여관에서는 “JP가 진짜 인물이다. 그의 시대가 온다”며 JP 자랑에 여념이 없던 40대 여주인장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3김의 휘호와 이따금 보내온 글씨를 보면서 이런 평가도 내려본다. YS의 글씨는 힘이 있지만 여백이 적어 부담스러웠다, DJ는 달변만큼 달필이었다, JP는 서법을 제대로 익혔고 여유가 있어 좋았다.
김동길 연세대명예교수의 말도 기억이 난다. DJ는 공부 양은 많은데 억지로 채운 듯하고, YS는 공부보다는 타고난 감에 의지했고, JP는 체계적 공부에 예술가적 몽상이 섞여 있다. 지난해 우연히 부여에 들렀다가 사라진 계백장군 동상의 흔적을 찾기도 했다. 돌아와서 지병으로 손을 제대로 못 쓰는 JP를 위로하는 난을 하나 보냈다.
JP는 개신교 신자이지만 형 김종락 씨는 불교신자, 한 동생은 서울 우이동 기슭에 절을 모실 정도로 종교에 열려 있었다.
중도라면 덮어놓고 회색분자로 모는 세상이다. 극단론이 진리의 탈을 쓰고 행세한다. 중도의 지혜와 경험이 아쉬운 때다.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했으면 한다. ‘불생불멸 불상부단(不生不滅 不常不斷), 불일불이 불래불출(不一不異 不來不出).’ 용수보살은 삶과 죽음, 영속과 단절, 같음과 다름, 오고 감 등이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른바 8가지 그릇된 견해를 부정함으로써 얻는 팔부중도(八不中道)의 경지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⑭회에서 송월주스님은 일초(一超) 라는 법명으로 출가했던 고은 시인과의 인연을 말합니다. 시쳇말로 젊은 시절 한방에서 뒹굴었던 젊은 출가자들의 속살과 고민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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