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18>금오 스님… “숙여라, 깊이 숙여라, 더 숙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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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5일 03시 00분


<160>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1954년 8월 불교정화운동을 위한 전국비구대표자대회가 개최됐다. 송월주 스님의 은사인 금오 스님(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을 비롯해 청담, 구산, 향봉, 자운 스님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불교신문 제공
1954년 8월 불교정화운동을 위한 전국비구대표자대회가 개최됐다. 송월주 스님의 은사인 금오 스님(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을 비롯해 청담, 구산, 향봉, 자운 스님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불교신문 제공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또는 말하고 잠잠하고 움직이고 조용히 하는 것들이 모두 마음이며,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도 마음이며, 노래 부르고 춤추며 웃는 것도 다 마음인 것이다. 이 마음이 범부(凡夫)도 되고 성인도 되는가 하면, 삼계에 윤회하여 천만 가지로 과보를 받게 되나니….”

은사인 금오 스님(1896∼1968·사진)은 마음밭의 이치를 이렇게 밝혔다. 금오(金烏)는 법호, 태전(太田)이 법명이다. 16세 때 금강산 마하연 선원에서 도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충남 예산 보덕사의 보월 스님 곁에서 정진했다. 보월 스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만공 스님(1871∼1946)에게서 보월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제자임을 증명 받았다. 1954년 전국 비구승대회 추진위원장으로 선출돼 정화불사의 선봉이 됐고 종단의 부종정과 총무원장을 지냈다.

나는 1954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은사의 성품은 불같았다. 하도 엄한 데다 금산사, 화엄사 주지를 지내 ‘지리산 호랑이’로 불렸다. 지금도 은사를 생각하면 부리부리한 달마상이 떠오른다.

나의 사형 탄성 스님은 소문난 ‘효(孝)상좌’였다. 어느 날 사형이 솥을 놓는데, 은사가 “여기 놓아라, 저기 놓아라” 하며 수차례 말을 바꿨다. 그러다 은사는 사형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던지 그 자리에서 따귀를 때렸다. 이른바 솥을 아홉 차례나 옮겨 걸면서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구정(九鼎) 선사의 일화를 연상시키는 가르침이었다.

은사는 수행 잘하는 제자에게는 더 엄했다.

출가 초기 은사가 화엄사 주지로 있을 때 나는 교무 일을 보고 있었다. 실내에서는 삼배(三拜), 밖에서 마주치면 90도 각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하는 게 예법이다. 무릎을 구부려 더욱 낮은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어느 날 내가 인사를 했더니, 은사는 “숙여라, 깊이 숙여라, 더 숙여라”고 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다시 “네놈 전생에 아만(我慢·스스로 높은 척하는 교만)이 있어, 그걸 버리라”고 했다.

살면서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아만을 버리는 것은 남에게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이다. 하심 없이 어찌 남을 설득하고, 종단을 개혁하고, 세상에서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굴곡이 많은 종단 개혁 과정에서 나를 원칙주의자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하심을 잊은 적이 없다.

은사의 하심에 대한 욕구는 너무나 강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행을 위해 거지들의 무리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첫째 어느 밥이든 가리지 않고 먹는다, 둘째 옷이 떨어져 살이 나와도 탓하지 않는다, 셋째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잠을 잔다고 결심했다. 움막을 짓고 2년간 거지 행세를 하며 수행해 ‘움막 스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훗날 은사는 “인간생활의 기본인 의식주에 매이지 않고 수행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당대의 선지식(善知識)인 수월 스님을 찾아 만주로 갔다가 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기도 했던 은사는 제자들의 교육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월산·범행·월남·탄성·이두·혜정·월성·월주·월서·월만·월탄 등 제자가 49명에 이른다. 손자상좌까지 합하면 600명이 넘는다. 특히 ‘월’ 자를 딴 제자가 많아 불교계에서는 ‘월자문중(月字門中)’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은사는 참선 공부를 소홀히 하는 제자에게 엄해 “나를 알려고 중노릇을 하는데 참선하지 않으면 중이 아니다”며 크게 야단을 쳤다. 어느 날 용맹정진 기간에 수마(睡魔)를 이기지 못하는 한 제자를 불러 “네 이놈, 다음 생에 짐승이 되려고 수마에게 지느냐. 그러려면 차라리 목숨을 버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내가 깊은 산속에만 머물지 않고 종단 개혁과 비정부기구(NGO)를 통한 사회활동에 뛰어든 것은 은사의 영향이 적지 않다. 다만, ‘참선하라’ ‘계행(戒行)을 지켜라’ ‘보살행을 실천하라’라는 은사의 가르침은 내게 각각의 셋이 아니라 하나였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19>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청담 스님을 회고합니다. 1950년대 불교계에서는 “설법 제일 동산, 정진 제일 효봉, 인욕 제일 청담, 지혜 제일 전강”이라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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