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1월 15일 청담 스님이 입적하자 동아일보를 비롯한 주요 신문들은 그 내용을 일제히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16일자 1면에 “이청담 스님 입적 향년 70세 뇌일혈로”라는 제목의 1면 기사와 사회면 기사로 불교계 안팎의 분위기를 상세하게 전했다. 신문들의 보도는 대개 15일 오전 7시경 주석하던 도선사 앞뜰에서 쓰러진 청담 스님이 오전 9시 40분경 우석대병원으로 이송돼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회생 가망성이 없다는 주치의의 소견에 따라 오후 5시경 조계사로 옮겨진 후 입적한 걸로 돼 있다.
실제는 조금 다르다. 내가 급보를 듣고 병원으로 갔을 때 스님은 이미 입적한 상태였다. 입적 장소가 조계사로 발표된 것은 종단 어른에 대한 배려였다.
스님의 입적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입적 하루 전인 14일에 도선사에 머물면서 오후에는 법문까지 했다. 이에 앞서 13일 강원 원주시 1군사령부 내 군법당인 법웅사 준공 법회에는 내가 스님과 동행한 뒤 서울 우이동의 모임 장소까지 배웅했다. 법회에는 사령관 한신 장군과 정권 실세이던 이후락 씨, 강창성 장군 등 1000여 명이 참석했다. 그날 스님은 장병들에게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뚜렷한 뜻을 깨쳐 통일에 이바지하라는 당부와 함께 “육신은 유한하지만 법신은 영원하다”는 유명한 법문을 했다. 이 법회가 스님의 마지막 외부행사가 됐다.
장례 절차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통상 큰스님의 입적 때 남기는 임종게(臨終偈)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장례홍보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런 말로 그 의견을 물리쳤다. “청담 스님의 생애가 보살입니다. 살아온 생애가 훌륭한데, 굳이 준비되지 않은 임종게를 남길 필요가 없습니다.”
임종게는 따로 발표되지 않았다.
영결식은 19일 오전 11시 동국대 운동장에서 종단장으로 거행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비서실장을 보내 조문하도록 했고 빈소에는 김종필 국무총리, 백두진 국회의장, 가톨릭의 노기남 대주교와 김수환 추기경, 최덕신 천도교 교령 등이 다녀갔다.
도선사에서 치러진 다비식에서 8과의 사리가 수습됐다. 처음 100여 과의 사리가 나왔는데 이 과정에서 사리가 부스러지자 스님들이 술렁거렸다. 사리는 단단해 쉽게 부서지지 않고, 색이 영롱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이때 성철 스님의 일갈이 나왔다.
“사리에는 구슬 모양의 쇄신사리뿐 아니라 화장 중 바람에 날아가 나뭇가지에 맺히는 응결사리도 있다.… 청담 스님은 타다 남은 뼈 전체가 사리다.”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 청담 스님이 열 살이나 위였지만 두 분은 평생 도반이자 친구로 지냈다. 청담 스님은 정화운동 초기를 빼면 두문불출한 채 수행에 전념하는 성철 스님에 대한 시비가 나올 때마다 줄곧 성철 스님의 편이었다. “성철 스님과 팔만대장경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난 성철 스님을 택하겠다”는 청담 스님의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성철 스님은 청담 스님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도반의 둘째 딸 인순이(묘엄 스님)를 발심시켜 출가하도록 했다.
청담 스님을 잃은 종단은 휘청거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종단이 얼마나 스님에게 크게 의지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내 생각으로, 광복 이후 여러 고승들이 명멸했지만 청담 스님은 수행과 행정 능력, 즉 이사(理事)를 겸비한 최고봉의 하나였다. 개신교 한경직 목사, 가톨릭 노기남 대주교와 교류하며 종교 간 벽을 허물고 사회와 소통하기에 부단히 노력했다.
40여 년 전 스님이 행한 법문은 나를 포함한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둘을 가진 자는 하나를 나누어 주고 하나를 가진 자는 반을 나누어 주고 반도 없는 자는 내 몸을 바쳐서라도 봉사해야 합니다.…이 혼탁한 사회 속에 뛰어들어 비록 내 몸에 때가 묻는 한이 있더라도 주변을 정화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는 불자의 본연한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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