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1월 10일 경남 합천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에는 만장(輓章)과 인파의 물결이 이어졌다. 마침내 인파가 멈춘 곳은 해인사에서 3km 떨어진 다비장이었다. 성철 스님 열반 7일째. 여기 모인 이들은 물론이고 이 땅의 많은 사람이 함께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세 번의 외침에 이어 화답이라도 하듯 불길이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 다비식에서는 100여 과의 사리가 수습됐다.
청담 스님은 생전에 “팔만대장경과 성철 스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성철 스님”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11월 3일, 국보 제32호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경판 석 장이 해인사 방장인 성철 스님의 허락을 받고 특별전시회를 위해 600여 년 만에 해인사를 떠났다. 다음 날 상좌 원택 스님이 대장경판의 서울행을 알리자 스님은 “나도 이제 갈 때가 되었나보다”라고 했다. 하루 뒤인 4일 오전 제자들과 유일한 혈육인 딸 불필(不必) 스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님은 “내가 너무 오래 세상에 머문 것 같다” “참선 잘하라”는 말과 함께 불생불멸의 길을 떠났으니 공교롭지 않을 수 없다. 가야산 영결식에는 30여 만 명이 몰렸다. 다비식 뒤 사리 친견 기간까지 포함하면 100여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1936년 해인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성철 스님은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며 종단의 선풍을 되살렸다. 스님은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서 두문불출한 채 수행에 전념하다 입적 전까지 해인사 퇴설당과 백련암에 머물렀다. 1967년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추대됐고 조계종 제6, 7대 종정을 지냈다.
사실 성철 스님은 정화운동 초기를 빼면 현실과는 거리를 두고 수행에 전념했다. 청담 스님과도 달랐고 현실 참여가 적지 않았던 다른 종교인들과도 달랐다.
그러나 스님이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스님은 큰스님들이 법문할 때 쓰는 ‘불교계의 주장자(주杖子)’ 같은 존재였다. 배가 고프거나 배가 불러 정도(正道)를 벗어날 때 “정신차리라”며 벼락같이 내려떨어지는 주장자였다.
실제 스님의 죽비는 정말 매서웠다고 한다. 낮의 울력에 이어 밤에 참선하는 스님들의 눈꺼풀은 천근이고, 몸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노장은 불시에 선방에 들어왔다, 한 손에 죽비를 들고서. 스님은 ‘졸지 말고, 밥 값 내놓아라’는 호통과 함께 죽비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간식하지 말라, 돌아다니지 말라, 말하지 말라, 잠을 적게 자라, 책 보지 말라’ 등 수좌 5계는 자신에게도 무섭도록 철저했던 스님의 수행관을 보여준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아아, 시회대중(示會大衆)은 알겠는가?/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981년 종정으로 추대된 스님은 취임식장에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이 종정수락법어는 스님의 법명이 산문을 넘어 세간에까지 알려지게 했다.
해인사 방장 시절 스님은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수행이 어려워지자 ‘나를 만나려거든 3000배를 하고 오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여기에는 다른 의미가 깔려 있다. 생전 스님의 말이다.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 있을 때 어떻게나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지, 산으로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요. …한 말씀만 해 달라 이거라. 그래 내가 그랬지요. ‘그럼 내 말 잘 들어, 중한테 속지 마라. 나는 승려인데 스님네한테 속지 말란 말이야….”
처음에는 억지로 절을 해도, 하다 보면 저절로 심중에 변화가 온다고 한다. 누구든 부처님께 3000배를 하면서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을 찾으라는 뜻이다.
1980년 10·27법난 뒤 14년 만에 총무원장으로 복귀한 나는 2주기 추모사를 통해 “나라가 어렵고 국민의 마음이 불안할 때 큰스님의 말씀과 위엄이 더욱 그립다. 성철 큰스님의 열반 2주기를 맞아 모든 사부대중의 의식개혁으로 새로운 한국불교를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24> 회에서도 성철 스님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불교계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돈오돈수 돈오점수 (頓悟頓修 頓悟漸修)’ 논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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