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사망]김일성의 ‘수령 절대주의’ 물려받아 독재체제 구축-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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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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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에서 사망까지


17일 사망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생애는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권력을 물려받아 ‘수령절대주의’라고 불리는 자신의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강화해온 과정이었다. 이는 곧 ‘북한 현대사’의 중요한 단락이자 ‘북한 몰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출생에서 성장까지

김 위원장은 1942년 2월 16일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하바롭스크 근교에서 김 주석과 어머니 김정숙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항일 빨치산 소부대가 소련군 영내에서 활동할 때였다. 북한은 그가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하며 이곳을 성지로 만들었지만 이는 그를 우상화하기 위한 거짓이다.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등의 증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어려서부터 권력욕이 강했고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1959년 1월 아버지를 수행해 소련공산당 제21차 대회가 열리는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인데도 김 주석의 부관들과 의사, 간호사 등 수행원을 집합시켜 놓고 하루 일과를 보고받고 지시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버지를 잘 모시는 일에 특별히 관심을 쏟았다. 아침마다 자기 아버지가 나갈 때 부축을 하고 나서는가 하면 신발을 신겨주기도 했다. 김일성은 당시 47세로 원기 왕성해 부축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아들의 부축을 받을 때면 마냥 흡족해했다.”(황 전 비서의 증언)

1964년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한 김 위원장은 공식 후계자로 내정될 때까지 10년간 선전선동부 부장 등을 지내며 아버지와 측근들의 신임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아버지의 권력을 신격화하고 그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작업을 통해 경쟁자인 삼촌 김영주 및 계모 김성애 등과의 충성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특히 예술적 재능을 발휘해 혁명 1세대의 환심을 사면서 후계 체제를 공고히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 위원장이 지휘해 만든 혁명가극 ‘피바다’와 ‘꽃 파는 처녀’의 공연을 관람한 노병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1974년 2월 14일 당 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는 그를 당내 권력핵심기구인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결정했다. ‘당 중앙’으로 불리며 공식 후계자로 낙점받는 순간이었다.

○ 후계 체제 확립

김 주석이 사망한 1994년까지 20년 동안 북한의 역사는 김 위원장이 자신의 후계 체제를 확립해 가는 과정이었다. 이 기간에 집단지도체제 등 당-국가 사회주의 국가의 일반성은 퇴색하고 유일지도체제인 봉건적 ‘수령 절대주의 체제’가 확립됐다. 북한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은 ‘김일성주의’로 변질됐다. 김 주석에 대한 개인숭배 교리인 ‘유일사상체계 10대 원칙’과 후계 체제 정당화를 위한 ‘혁명적 수령관’ 등은 모두 김 위원장의 작품이다. ‘광폭정치’와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등의 담화도 창안해 독재체제 구축에 활용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후계자가 된 1974년 전후를 정점으로 북한 경제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자립적 민족경제’를 모토로 한 폐쇄적 경제 시스템은 세계 자유시장과의 교역을 가로막아 북한 경제를 악화시킨 주된 요인이었다.
▼ 1995년부터 ‘고난의 행군’… 3년간 350만명 굶어 죽었다 ▼


더구나 김 위원장은 정치와 사상을 경제논리보다 앞세우며 ‘3대혁명소조운동’ 등 대규모 돌격전을 무리하게 추진했다. 김일성 우상화와 신격화, 대외적인 체제 선전에도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다. 김 위원장은 한국의 1988년 올림픽 개최에 대응하기 위해 이듬해 평양에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면서 45억 달러 정도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 ‘고난의’ 김정일 시대


1994년 김 주석의 사망으로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가 열렸다. 후계자의 지위에서 이미 아버지를 능가하는 실질적 통치차로 군림해온 그였다. 고령의 아버지를 제쳐놓고 중요한 사안을 직보 받으며 권력을 장악해가던 시기였다.

그 때문에 김 주석이 같은 해 7월 개최를 추진하던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돌연 사망하자 일각에선 김 위원장이 관련돼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당시 권력 핵심부에서 일했던 탈북 관료의 증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아버지의 통일론에 극도의 반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또 김 주석은 당시 급속히 악화되는 경제 상황을 뒤늦게 알게 된 뒤 아들에게 이를 추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한 부자 갈등의 와중에 김 주석은 사망했다.

김 위원장은 북한의 유일 최고지도자가 되자마자 극심한 흉년과 이로 인한 기아사태가 지속되는 ‘고난의 행군’에 맞닥뜨렸다. 당시의 경제위기로 1995년부터 1997년까지 3년 동안 350만 명가량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아버지의 ‘유훈 정치’를 내세워 3년간 책임을 회피하던 그는 1997년 10월 8일 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함으로써 공식적인 북한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선군정치’와 ‘강성대국’을 기치로 내걸고 붕괴 직전의 국가 재건에 나섰다. 김 위원장은 경제적 이권을 통해 측근들을 철저히 관리, 통제하는 이른바 ‘측근정치’와 ‘수령경제’ 등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롤렉스 시계나 벤츠 승용차 같은 고가의 명품을 나눠주는 ‘선물정치’로 충성 경쟁을 유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외교적으로는 ‘벼랑 끝 전술’로 불리는 도발과 협상을 반복하는 강온 양면전략을 통해 한·미 양국 정부로부터 경제적 보상을 얻어냈다. 그러나 2006년 이후 북한 경제는 다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그는 햇볕정책의 단맛에만 집착했고 남북관계는 2008년 한국의 이명박 정권 등장 후 일순간에 악화됐다. 상황을 타개하고자 지난해 천안함 폭침 및 연평도 포격사건 등의 도발을 일으켰지만 오히려 강경해진 한국과 미국의 압박에 부닥쳤다. 지난해 말 전격 공개한 영변의 우라늄 농축시설의 존재도 6자회담 복귀에 걸림돌이 됐다.

생전의 그는 숱한 여성편력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그와 부부관계인 것으로 알려진 여인만 4명이다. 김 위원장은 결혼하기 전인 1969년부터 영화배우 출신 유부녀 성혜림과 동거했고 1971년 아들 정남을 낳았다. 1974년에는 중앙당 전화교환수 출신인 본처 김영숙과 결혼해 딸 설송 춘송을 낳았다. 1976년에는 무용수 출신 고영희를 애첩으로 맞아들였다. 고 씨는 1981년 정철, 1983년 정은을 각각 낳았다. 네 번째 여자는 개인 비서 겸 부인으로 알려진 김옥이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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