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은 영화광으로 유명했다. 북한의 2인자로 내정되기 이전인 1980년대부터 혁명영화(정치적 색채가 짙은 예술영화)를 다수 제작하면서 영화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의 대표작은 ‘조선의 별’로 인민예술가 최익규와 함께 만들었다. 1920년대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의 항일투쟁을 미화한 내용으로 1980년부터 제작한 10부작 혁명영화다. 김일성 70회 생일(1982년) 즈음에 개봉했다.
체제 선전을 기막히게 잘하는 북한 주장에 따르면 이 영화의 총관객은 2억5000만 명, 2000만 인민이 10회 이상 관람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선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세계적인 정치학습의 나라인 북한에서 2000만 인민이 평생토록 하는 김정일 사상 학습과 마찬가지로 혁명영화 관람도 의무다.
감수성이 풍부한 당시 70대 노인이던 김일성과 그의 전우인 국가원로들은 ‘조선의 별’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낙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여러 편의 혁명영화는 아버지께 영화로 효도하고 싶어서였고 영화로 인민들의 사상을 계몽하기 위해서였다.
옛 소련의 지원을 받아 시작한 북한 영화는 외국 축전에 내놓을 만한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고안해낸 아이디어가 1978년 1월과 7월 남한의 유명 영화배우 최은희와 신상옥 영화감독을 홍콩에서 납치한 것이다. 평양에 김정일이 지어준 동양 최고의 신필림영화촬영소를 가진 두 사람은 ‘소금’(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연기상) ‘돌아오지 않은 밀사’(체코 카를로비바리영화제 감독상) 등 명화를 만들었다. 오래도록 자신에게 충실할 것 같았던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1986년 3월 해외촬영 중 자유세계로 탈출하자 그는 고배를 마셨다.
노동당 경내에 있는 영화문헌청사는 김정일 전용영화관이었다. 수만 개의 외국 영화필름을 그대로 혹은 CD로 보관하고 있다. 영화 제작에 든 비용이나 장소까지 정확히 기록해 영구 보존한다. 할리우드영화는 물론이고 남한에서도 찾기 어려운 필름이 여기에 있다고 보면 된다.
그 많은 외국영화 가운데 김정일 취향에 맞춰 엄선해 그에게 보여주는 것이 관례다. 상영시간은 따로 없고 그가 오면 상영한다. 어떤 날은 혼자, 어떤 날은 측근들과 끝까지 보기도 하고 도중에 가기도 했다. 영화를 본 그가 “잘 봤다”고 하면 그 필름은 특수금고에 따로 보관했다. 아무리 훌륭한 영화라도 그가 “별로다” 하면 즉시 휴지통에 들어갔다.
그가 집무실과 관저에서 봤던 TV는 CNN과 NHK, 남한의 KBS와 MBC 등이다. 뉴스와 다큐멘터리, 사극을 좋아했고 코미디 프로는 단골 메뉴였다. 평일 오후 5시 시작해 오후 11시 종료되는 북한 공영방송인 ‘조선중앙텔레비전’은 그가 전혀 안 본 TV였을 것이다. 방송 시작부터 종료까지 100% 자기를 찬양하고 미화하는 프로그램인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낯 뜨거워서 어떻게 봤을까. 그것은 인민들 사상교육용이었다.
어떤 이유든 생전의 김정일은 영화적인 인물이었다. 12만여 km²(북한 면적)의 거대한 세트장에 2000만 인민 엑스트라와 수많은 유명 감독(300만 절대충성분자)들이 있었다. 20대에 가졌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국 통치자의 꿈을 영화로 인해 영화처럼 이룬 김정일은 영화 덕에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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