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김정은 시대]“김정은, 김일성-김정일 독재했듯이 그대로 따라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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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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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北유학생 시절 불가리아 망명한 이상종 박사

"김정은이 아니라 실제로 아버지 연령대의 군인들이 권력을 잡고 있으니 김정은 체제의 앞날은 군부의 입김에 좌우될 것이다. 군부가 전폭적으로 지지하면 권력을 유지하고, 군부 생각이 바뀌면 권력 유지가 어려울 것이다. 쿠데타가 생길 수도 있다."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 거주하는 이상종 박사(75)는 함경남도 여흥군(현재의 인흥군) 출신으로 북한 김일성 체제에서 촉망받던 엘리트였다. 그러나 1962년 8월 불가리아 소피아 대학 화학공업대학을 다니던 중 동료 북한 유학생 3명과 함께 김일성 주석의 유일지배독재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불가리아로 망명했다.
그 후 50여년 간 망명생활을 해온 이 박사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은 특별한 감회를 주는 사건이었다. 23일 소피아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이 박사는 김정은으로 이어진 3대 세습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왕정 국가에서도 자식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면 다른 사람을 후계자로 내세웠는데 요즘 세상에 3대 세습이라니…. 일가족이 아닌 사람이 권력을 잡았다면 북한이 새로운 정책을 펼 수도 있고 평화통일도 진척될 수 있겠지만 이젠 쉽지 않을 것 같다. 가족이 잡았으니 자기 할아버지 아버지가 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갈 것이다."
불가리아의 체제변혁을 현장에서 지켜봤던 그에게 북한체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불가리아는 사회주의 시절에도 국민들에게 가혹한 정책을 펴지 않았다. 그래서 체제변혁기에 공산당과 반(反)공산주의자들이 협상을 거쳐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독재정치를 해온 북한 상황은 다르다. 북한 체제는 사회주의라고 할 수도 없다. 사람을 굶어죽게 만드는 봉건 관료 개인독재에 불과할 뿐이다. 북한의 지식인 가운데 개방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나서서 군대를 이끌지 못한다면 앞으로 북한의 개방을 기대하기 어렵다."
―유학생 시절 김일성 반대 성명을 냈던 이유는.
"김일성이 6·25 전쟁을 일으키고도 남한이 도발했다는 주장을 한데다 권력 확립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경쟁자들을 죽였나. 남로당과 중국계 연안파 등 정적을 모두 숙청하면서 자기만 나라를 위한다고 주장하면서 독재로 치닫는 것을 보고 망명을 결심했다. 그래서 1962년 8월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구소련 공산당을 비롯한 각국 공산당에 김일성 반대성명을 보냈다."
그는 북한이 6·25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을 동료 유학생을 통해 확인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일성종합대학교 1학년에 다니던 학생이 3·8선에서 인민군으로 근무하고 전쟁에서 세운 공훈을 인정받아 불가리아로 유학을 왔다는 것이다. 그를 통해 북한이 6·25 전쟁 이전부터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망명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텐데….
"당시 그는 불가리아 내 북한 청년동맹 회장을 맡았던 내가 그런 성명을 냈으니 북한 노동당에서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겠지. 북한 내부는 이 사건으로 발칵 뒤집혔다. 뜻을 같이한 동료 유학생 3명과 함께 총 4명이 서명한 문서를 보낸 뒤 얼마 되지 않아 모두 북한 대사관에 끌려갔다. 내 생일 전날인 9월 27일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면도칼로 카페트를 찢어 묶은 뒤 창문을 타고 내려와 도망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불가리아의 논문 지도교수와 학장들이 내가 북한으로 끌려가지 않고 불가리아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공항과 육로 검문소 등을 지키는 등 많은 애를 썼더라. 불가리아인 친구 가운데 일부는 북한대사관 근처에서 망원경으로 계속 지켜봤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이 박사는 뜻을 같이한 동료 유학생 이장직, 최동성, 최동준 씨와 함께 △6·25 전쟁을 북한의 침략전쟁이고 △북한이 말하는 체코식 경제개발계획은 허구이며 △김일성 선집보다는 성경을 읽는 게 낫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었다. 북한은 불가리아 정부가 유학생 망명을 허용했다는 이유로 1968년까지 6년간 문화교류를 전면 중단했었다.
―불가리아 국적 취득을 거부했던 이유는.
"불가리아에선 외국인도 5년 거주하면 국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김일성 대대손손으로 권력이 이어지는 것이 없어져야 북한이 제대로 된다는 의식을 가졌던 내가 불가리아의 국민이 된다면 정치적 망명자의 신분이 사라지고 김일성 반대의 명분도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무국적자로 지내다가 한국과 불가리아가 수교한 뒤인 1992년 1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앞으로 북한이 나가야 할 길은 어떤 것이라고 보나.
"프랑스나 북유럽에서는 잘 사는 사람들이 세금을 많이 내서 못사는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도와준다. 그게 사회주의다. 사람을 굶어죽게 만드는 북한은 사회주의라고도 할 수 없다. 정치가들은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후에는 언론 자유가 있어야 한다. 때로는 굶어죽는 것보다 말 못하는 게 더 불쌍하다. 할 말을 못하는 스트레스가 큰 병으로 이어진다."
망명 후 소피아 대학에서 화학공업 박사 학위를 딴 그는 불가리아 국립화학연구소를 거쳐 개인 사업체를 차렸다. 이곳에서 오물 폐수 처리 분야 등 특허 13개를 취득했고 불가리아 국가기술진보상을 3차례 수상했다. 불가리아인 부인 릴리야 보리스라보바 욘체바 씨는 2년 전 세상을 떠났고 현재는 딸과 함께 소피아에 살고 있다. 북한의 부모는 이미 타계했고 핵물리학자인 이철종 박사를 비롯한 동생들이 남아있다. 성명을 함께 발표했던 동료 유학생 가운데 최동준 씨도 몇 해 전 세상을 떠났다.
이 박사는 뭔가 생각나면 바로 실천하는 성격의 사람이다. 대학교 후배인 욘체바 씨에게 청혼할 때에도 이런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대학원 연구생 시절의 어느 일요일 욘체바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5일간 시간을 줄테니 결혼할지 여부를 결정해라. 금요일까지 대답하고 토요일에 잔치하자. 그게 싫으면 갈라서자."

처음에 반대했던 처갓집에서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혼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게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이 박사는 "김일성 가족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권력을 잡아 북한 정권이 개방적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고향에 자유롭게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소피아=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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