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40>“남을 욕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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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27일 03시 00분


<182>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금산사를 찾은 속가 가족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송월주 스님(가운데). 스님은 금산사와 가까운 정읍시 산외면이 고향으로 1961년 26세에 금산사 주지가 됐다. 송월주 스님 제공
금산사를 찾은 속가 가족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송월주 스님(가운데). 스님은 금산사와 가까운 정읍시 산외면이 고향으로 1961년 26세에 금산사 주지가 됐다. 송월주 스님 제공
내 고향은 전북 정주시 산외면(山外面)이다.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읍시에 속한다. 타지 사람들은 이곳을 풍수적으로 모래펄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모양새, 평사낙안(平沙落雁) 형의 명당 터라고 했다. 노령산맥의 줄기인 575m의 상두산(象頭山)도 있다. 부처님이 설법을 펼친 산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어린 시절에는 쌀농사도 제법 했지만 지금은 토종 콩과 한우 산지로 유명하다.

나는 1935년 5남 4녀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속명은 현섭이다. 남자 형제 중 막내였다. 아버지(송영조)는 자수성가한 대농으로 사서삼경에 능통했고 운(韻)이 떨어지면 시를 척척 지을 정도로 한학에 밝았다. 집안은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아버지는 유교적 사상과 예법에 관해 자주 얘기했다. 실제 생활과 관련한 구체적인 주의를 주기도 했다. 이를테면 근검절약은 물론이고 술과 노름, 여성과의 관계를 엄격히 절제하라고 했다.

어머니(최종을)는 엄격했던 부친과 달리 막내아들의 어리광을 항상 잘 받아주던 분이다. “남을 욕하지 마라” “싸움판에 끼지 마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자주 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녹록지 않은 세월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삶의 지혜가 담긴 조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욕하다 보면 싸우고, 싸움 속에 쉽게 보이는 것이 욕이다. 어머니는 어쩌면 아들이 세상 시비에 휩싸이지 않고 자신의 품위를 지키면서 여유 있게 살기를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나를 서울 중동중학교에 진학시켰다. 농지개혁 등의 이유로 가산이 기울기는 했지만 월반(越班)할 정도로 성적이 괜찮았던 막내아들의 총기를 그냥 썩히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중학시절은 연극과 영화에 흠뻑 빠져 지냈다. 이순신 장군, 사육신과 단종, 김구 선생…. 지금 기준으로는 그다지 뛰어난 작품이 아닐 수도 있지만 처음 접하는 연극이며 영화는 새로운 세계였다. 위인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작품이 많았다. 로맨스를 다룬 작품보다는 교훈적이고 영웅적인 작품들이 좋았다.

학교는 마칠 수가 없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둘째 형이 선거에 나서자, 나도 형을 돕기 위해 고향에 내려왔는데 곧 6·25가 터졌다.

10대 중반에 접한 전쟁은 내 인생 전체에 어쩔 수 없이 큰 영향을 끼쳤다. 전쟁 통에 육친이 죽는 아픔을 겪지는 않았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은 내게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전에는 마을 전체가 한 가족처럼 지냈지만 전쟁이 나자 이념갈등으로 총부리를 겨누는 일이 벌어졌다.

사실 나는 중학교 때만 해도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식객(食客)을 마다하지 않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우리 집은 재주꾼들이 모여 문학적 재능을 뽐내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방이었다. 둘째, 셋째 형이 잇달아 정치적 포부를 가지면서 선거 얘기가 주가 됐다.

나도 형들의 영향으로 정치에 관심이 많았지만 체질적으로 기가 약했다. 6·25가 터지자 가산 몰수를 당하고, 포격으로 화염이 치솟거나 흉흉한 분위기를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고 정치가 내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전쟁이 끝났지만 다시 서울로 갈 수 없었다.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졌고 난리를 겪은 부모님은 나를 다시 서울로 보내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셨다. 대신 집에서 가까운 정읍농고로 진학했다. 40여 년이 지난 1998년 나는 뒤늦게 중동고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산외초등학교 시절 추억이 있다. 40리 길을 걸어 금산사로 소풍을 가곤 했다. 볼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이다. 제법 먼 길이지만 힘든 기색도 없이 절에 도착해 법당의 부처님을 보고 감탄했던 기억들이 난다. 처음 만난 부처님은 무섭기보다는 우람하고 웅장했다. 상춘객도 적지 않았고 지프를 탄 미군도 여럿 있었다. 금산사 전체에 벚꽃이 만개했었다. 벚꽃이야 지금도 볼 수 있지만, 어린 눈에 비친 그 벚꽃의 자태와 향을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41>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출가에 얽힌 이야기를 계속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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