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이야기]<117>갈치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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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27일 03시 00분


값싸고 맛좋아 옛날부터 ‘국민생선’으로 인기

갈치가 고등어에게 ‘국민생선’ 자리를 내줬다. 최근 어획량이 줄면서 가격이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당분간 서민들은 갈치조림, 갈치구이 먹기가 부담스러울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에도 물 좋은 갈치는 값이 만만치 않았다. 이 때문에 갈치가 언제부터 국민생선이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무와 함께 조린 갈치조림이나 노릇하게 구운 갈치구이가 오랜 세월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 온 것만큼은 틀림없다. 소금에 절이면 장기 보관이 가능해 운반이 쉬운 데다 값싸고 맛도 좋아 옛날부터 신분의 높고 낮음과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모두가 즐겨 먹었다.

조선후기인 정조 무렵 한양에는 바다생선인 갈치가 흔했던 모양이다. 실학자 서유구는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 소금에 절인 갈치를 사먹으라(不欲費錢Q 須買葛侈R)’는 말이 있다고 적었다. 맛도 좋지만 가격도 싸서 많은 사람들이 먹는다는 뜻이다.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이덕무가 아정유고(雅亭遺稿)에 당시 한양의 모습을 읊은 시를 남겼는데 종로의 육의전 풍경으로 추정된다. 여기 상점에 쌓인 갈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거리 좌우에 늘어선 수많은 상점/온갖 물건이 산처럼 쌓여 헤아리기 어렵다/비단가게에 울긋불긋 널려 있는 건/모두 능라와 금수이고/어물가게에 싱싱한 생선이 두텁게 살쪘으니/갈치 농어 준치 쏘가리 숭어 붕어 잉어라네(후략)”

여러 민물고기와 함께 갈치가 한양 주민의 입맛을 유혹했던 것이다. 갈치는 고등어처럼 소금에 절여 운반하니 장기 보관이 가능해 돈이 되는 좋은 갈치는 잡아서 대부분 서울로 올려 보냈다. 이 때문에 정약용은 어촌에서 오히려 갈치를 먹기 힘들다는 글을 남겼다. “싱싱한 갈치와 좋은 준치는 모두 한성으로 올려 보내고 촌마을에는 가끔씩 새우젓 파는 소리만 들린다.”

서울 어물전에 팔도의 좋은 갈치가 모두 모이니 가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구한말 관청에 물품을 납품하던 지규식(池圭植)이 남긴 ‘하재일기(荷齋日記)’에 일꾼의 술값으로 1냥 5전을 지급했는데 1냥은 갈치 값이라고 했다. 1냥의 값어치가 지금 가치로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밤에 참외 1냥어치를 사먹었다고 한 것을 보면 갈치 값이 상당히 헐값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갈치는 우리나라 바다에서 일년 열두 달 모두 잡혔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동해와 서해, 남해에서 모두 갈치를 잡는데 계절에 따라 많이 잡히는 지역이 다르다고 했다. 이렇게 갈치가 많이 잡혔으니 오랜 세월 갈치조림과 갈치구이가 주머니 가벼운 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이랬던 갈치가 최근에 국민생선의 위치를 고등어에게 내주었다는 뉴스를 보니 새삼스럽게 갈치조림에 입맛이 당긴다.

참고로 갈치의 어원은 문헌마다 다르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허리띠 같아서 대어(帶魚), 혹은 칼처럼 생겨 검어(劍魚) 또는 도어(刀魚)라고 했다. 물고기의 생김새가 칼처럼 기다랗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서유구는 ‘난호어목지’에서 어부들은 가늘고 긴 모습이 마치 칡넝쿨 같아서 갈치(葛侈)라고 부른다고 했다.

작고한 수산학자 정문기는 1939년 동아일보에 실린 글에서 경기 이남의 서해안에서는 갈치, 경북 이북과 북한에서는 칼치라고 부른다고 썼다.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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