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국제개발구호 비정부기구(NGO)인 지구촌공생회를 창립했다. 종단 개혁을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한 뒤 ‘깨달음의 사회화’를 위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뒤였다. 자연스럽게 민족의 울타리를 벗어난 지구촌 현실에 눈길이 갔다.
이에 앞서 강문규 서경석 목사 등이 찾아와 지구촌 차원의 나눔 운동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이 모임을 위한 행사에도 참여했지만 같이하기 어려운 사정이 생겼다. 그러던 중 외국 방문길에 나서는 혜진 스님에게 현지 조사를 부탁했다. 뒤에 스님의 말과 사진으로 접한 일부 동남아 국가의 상황은 처참했다. 6·25전쟁 뒤 배부르게 한 끼 먹기도 힘들었던 과거 우리의 굶주림이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학교와 수도, 전기 등 최소한의 기반시설도 부족한 그곳에서 사람들은 매일 생존을 위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나는 캄보디아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 몽골 등을 현지 답사한 뒤 지구촌공생회 설립에 나섰다. 준비 기간을 포함하면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다른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일단 시작하면 중단되지 않고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단체 설립은 쉬울 수 있지만 의미 있는 활동이 가능하기까지에는 적잖은 돈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의 고희 회고록 출간을 위해 상좌들이 십시일반 모은 1억 원과 ‘인도성지순례기’ 출판을 위해 준비한 2억 원 등이 공생회 설립을 위한 종잣돈이 됐다. 정련, 종상, 성타, 지홍, 정념(월정사), 혜자, 설송, 도영 스님 등이 이사로 참여하면서 기금을 보탰다. 정토회 법륜 스님의 한국JTS(Join Together Society)가 있기는 했지만 공생회는 불교계 인사들이 함께 참여해 만든 첫 번째 국제개발구호 단체였다.
내 기억으로 6·25전쟁 뒤 군사 원조를 뺀, 한국에 전달된 해외 원조액은 230억 달러 수준이었다. 이 원조는 국제기구를 통해 들어와 기아와 전후 복구를 위해 사용됐다.
지구촌공생회를 시작할 때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 정도였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도움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바뀔 시기가 된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국가와 민족, 인종과 언어, 종교와 문화, 이념과 사상에 차이가 있더라도 이를 차별하지 않고 돕는 것이 우리 삶의 의무다.
불교적으로는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해소하도록 나눔을 생활화하는 것이야말로 보살행(菩薩行)이다. 그래서 지구촌공생회는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세상이 나와 더불어 한 뿌리),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모든 존재는 나와 더불어 하나)’라는 가르침의 실천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5년까지 나는 북한 동포를 돕기 위해 설립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용 목사와 함께 공동위원장을 맡은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활동을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으로 북한 동포를 돕는 활동이 논란에 휩싸이고, 정부의 실업 문제에 대한 지원이 활발해진 뒤에는 공생회 활동에 힘을 집중했다.
공생회는 캄보디아 라오스 몽골 미얀마 네팔 케냐에 지부를 개설해 활동가를 파견하고, 식수 지원과 교육, 지역개발을 돕고 있다. 후원회원은 창립 뒤 3년 만에 1000명이 넘었고, 지금은 회원 7000여 명이 공생회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이 단체를 창립한 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 활동을 통해 빈곤한 이들을 구하는 자비가 곧 부처님의 가르침임을 실감했다.
공생회의 첫 지부를 세운 캄보디아는 물 사정이 나빴다. 일부 지역을 빼면 대부분 빗물과 웅덩이에 고인 물을 식수로 사용한다. 웅덩이 물은 오염 상태가 심해 각종 수인성 질환의 원인이 되고 있다. 마을에 우물이 생겼을 때 현지 주민들이 환호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마을은 물론이고 멀리 떨어진 곳의 사람들까지 찾아와 우물이 생긴 것을 축하했다. 작은 노력으로 현지인들이 감격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다.
지구촌은 말 그대로 한 일가(一家)다. 너와 나, 그리고 세상이 하나임을 깨달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즐거움은 무척이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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