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에 들어서면 난초의 그윽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대숲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하다. 근대 서화가 중 난초와 대나무 그림에서 으뜸가는 소호 김응원(小湖 金應元·1855∼1921)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1868∼1933)의 묵란과 묵죽이 오묘한 이중주를 빚어낸 것이다.
11일∼2월 19일 열리는 ‘소호와 해강의 난죽(蘭竹)전은 대원군의 ‘석파란’을 이어받아 독자적인 ‘소호란’을 개척한 김응원과 조선시대 묵죽을 바탕으로 새 경지를 열었던 김규진의 작품세계를 조명한 전시다(02-720-1524). 올곧은 선비를 상징한 ’사군자‘ 중 난죽을 테마로 삼아 대중과 미술시장이 외면해온 개화기의 미학, 한국 근대기 서화의 가치를 재평가하려는 시도다.
서울 신세계 갤러리(신세계백화점 본점 12층)에서 2월 1일까지 계속되는 ‘사각사각-조선시대의 함과 소품’전은 가구의 아름다움을 통해 옛 사람의 미의식을 살펴보는 자리다(02-310-1924). 사각형으로 만든 용품을 모은 전시는 실용성과 예술적 성취를 겸비한 오래된 디자인에서 우리가 새롭게 배워야 할 미감을 일깨운다.
두 전시는 ‘오래된 미래’와 현대를 잇는 연결고리를 주목하며 전통의 미래적 가치를 깨닫게 한다. 새해 새 마음을 맑은 기운, 고요한 아름다움을 지닌 우리 문화의 향기로 채우기에 좋은 기회다.
○ 바르고 반듯한-옛 가구
경운박물관과 공동 기획한 ‘사각사각’전은 ‘반듯한 사람’이란 표현이 절로 떠오를 만큼 어느 하나 버릴 데 없이 재료와 비례를 제대로 살려낸 네모반듯한 생활용품 59점을 선보였다. 도장을 보관하는 인궤부터 목침, 문갑, 찬합, 함에서 한국의 전통 미니멀리즘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모든 각이 90도로 떨어지는 형태, 용도에 따라 달라지는 비례가 어우러진 가구에서 기능과 디자인이 일체화된 균제미, 편안한 자연미가 돋보인다. 현대적 조각과 유명 디자이너 가구에 뒤지지 않는 존재감이 인상적이다.
물건 넣는 상자를 대표하는 것이 함이다. 위쪽을 뚜껑처럼 전부 여는 형태를 함, 전면과 상부를 경첩으로 잇고 한 면만 여는 것을 궤라고 불렀다. 서책과 귀중품, 패물 등을 담는 함과 궤는 집마다 필요에 따라 만들어 썼기에 소재와 크기가 다양했다. 전시에선 청빈한 선비의 소탈한 가구, 세도가의 사랑방과 안방에서 사용했을 법한 호사스러운 가구가 대비를 이룬다. 나무 결은 살리되 장식은 배제한 가구의 간결함, 상어가죽 화각 나전 등 구하기 힘든 재료를 사용한 용품의 화려함. 각기 다른 매력을 뿜어내지만 전통과 서구식, 어떤 주거공간에 놓여도 돋보이는 조형성을 공유한다.
알아주는 이 없어도 숲 속에서 향기를 내뿜는 난초, 거친 바람에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를 조명한 ‘난죽’전은 조선 선비의 정신과 근대의 미의식에 초점을 맞췄다. 소호의 20점, 해강의 13점, 합작품 1점이 선보인 전시다. 학고재 우찬규 대표는 “전통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강점기의 영향 때문인지 우리 것의 평가에 인색한 현실이 안타깝다”며 “올 한 해 난향처럼 향기롭고 대 바람처럼 평안하길 비는 마음에서 첫 전시로 마련했다”고 소개했다. 전통 족자와 병풍 외에 현대식 액자로 새롭게 표구한 작품도 선보였다.
소호는 바위 틈새와 절벽에서 자라는 난초를 주로 그렸다. 가늘고 길게 뻗친 섬세한 잎, 활발한 동세가 특징인 그의 석란도는 일정한 묵색을 사용해 단아한 느낌을 준다. 해강의 묵죽화풍은 매우 현대적이다. 그는 우람한 대나무의 중간 토막, 단도처럼 짧은 댓잎이 한쪽으로 날려 세찬 바람을 표현하는데 능했고, 고암 이응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전시장 한 벽을 차지한 그의 10폭 병풍과 다양한 풍죽도(風竹圖)에 늘 변하지 않는 대나무의 푸름과 꼿꼿한 절개가 고스란히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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