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3개월간 억류 조진혜 씨 “北 군인들, 中 수용소 드나들며 모진 고문 자행”
5일 美의회 ‘中 탈북자 북송’ 청문회 서는 2人
“감방 벽에는 탈북자들이 손톱으로 쓴 ‘여기서 죽고 싶지 않다’는 절규가 빼곡합니다. 처음 수용소에 들어와 일주일은 그거 읽는 데 정신이 팔려 북송될 처지라는 것도 잊곤 했습니다.”
네 차례나 탈북과 북송을 거듭하며 중국 옌볜(延邊) 투먼(圖們) 수용소에 1년 3개월 넘게 억류됐던 조진혜 씨(25·여·사진)는 수용소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린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빨리 북송돼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2006년 11월 다섯 번째 탈북 때 베이징(北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 진입해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미국으로 망명해 현재 워싱턴 근교 간병인 알선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조 씨는 5일 미 의회의 중국 탈북자 강제북송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선다.
2월 2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조 씨는 “북한 보위부 군인들이 수용소에 자유롭게 출입했다”고 전했다. “북한 군인들은 중국 공안의 묵인하에 북송 전부터 수용소에서 신문을 시작합니다. 인터넷 사용자, 기독교 신자, 한국행 탈북자를 3대 중범죄인으로 분류해 모진 고문을 해댑니다.”
조 씨는 수용소 간수들로부터 “너희들은 참나무 한 대 값밖에 안 되는 인간들”이라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고 한다. 이는 중국이 탈북자 한 명을 북한에 넘겨줄 때마다 북한 정부로부터 참나무 한 그루를 받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2000년대 초부터 북한 삼림이 급속하게 헐벗게 된 데에는 탈북자 급증이 중요 원인을 차지할 정도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함경북도 무산이 고향인 조 씨는 1996∼97년 아버지와 네 형제가 굶어죽자 11세 때인 1998년부터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탈북을 시도했다. 투먼수용소에 억류된 것은 2005년 네 번째 탈북에 실패해 북송되기 전이었다.
그는 “수용소에는 감시용 CCTV가 여성 화장실과 샤워실에까지 설치돼 있어 젊은 여성 탈북자가 샤워할 때면 간수들이 CCTV 모니터실에 모여 낄낄거리며 웃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회상했다. 탈북자들은 식사 때 나오는 물에 소금을 탄 멀건 배춧국에 질려 간수들에게 중국 군인들이 먹고 남긴 음식 찌꺼기라도 국에 넣어 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조 씨는 2006년 탈북에 성공한 후 한국행을 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당시 노무현 정권이 남한 정착 탈북자들에게 북한 인권에 대해 말도 못 꺼내게 하는 분위기라고 해서 실망하고 미국행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8년 3월 미국에 도착한 조 씨는 그해 7월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만나 북한 인권에 대해 호소했다.
“당시 제가 부시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했던 말은 중국의 탈북자 강제송환을 막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굶주린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와 생존을 향한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 통로를 막으면 혹독한 고문과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중국은 알면서도 방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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