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그의 시다. 한문학자로서 ‘다산시연구’를
펴낸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다산은 단지 재능이 뛰어난 시인이 아니라 위대한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다산의 시가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를 송 교수가 정리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다산이라고 하면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그의 대표적 저술과 함께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는 2500여 수의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다. 물론 시작(詩作)을 전업으로 한 건 아니고 다른 선비들처럼 학문과 정치, 그리고 시작을 동시에 수행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자신의 학문적 성격이나 정치적 성향을 시에 반영하지 않았고 시와 정치, 시와 학문이 별개였던 반면 다산은 학문과 시를 하나로 통일했다. 즉, 다산의 실학사상이 시로 형상화된 것이다.
재능 있는 시인에 머물지 않고 ‘위대한’ 시인이 되기 위해선 개인의 정서 속에 집단의 정서가 녹아 있어야 한다. 개인과 집단, 개인과 사회, 개인과 국가, 나아가 개인과 세계를 독립된 별개로 보지 않고 서로 관련돼 영향을 미치는 유기체로 인식해야만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있다.
‘제비 한 마리 처음 날아와/지지배배 그 소리 그치지 않네/말하는 뜻 분명히 알 수 없지만/집 없는 서러움을 호소하는 듯/느릅나무 홰나무 묵어 구멍 많은데/어찌하여 그곳에 깃들지 않니/제비 다시 지지배배/사람에게 말하는 듯/느릅나무 구멍은 황새가 쪼고/홰나무 구멍은 뱀이 와서 뒤진다오.’(燕子初來時 남남語不休/語意雖未明 似訴無家愁/楡槐老多穴 何不此淹留/燕子復남남 似與人語酬/楡穴鸛來啄 槐穴蛇來搜)―‘고시 27수’ 중 제8수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고립무원의 신세가 돼 경상도 바닷가 장기(長기)로 유배됐을 때 다산이 지은 작품이다. 유배지에서의 어느 봄날 쉬지 않고 지저귀는 제비를 보고 문득 자신의 처지를 슬퍼한 것이다. 제비같이 연약한 그의 주변에는 황새나 뱀 같은 무리들만 있어 어느 곳에서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조가 죽기 전 그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를 모함하는 무리는 다산을 바닷가 마을로 추방했다. 그러나 순전히 개인적 슬픔만은 아니다. 다산은 동물이나 식물을 등장시킨 우화시를 많이 썼는데 자연계에서의 강자와 약자의 대립을 주로 그리고 있다. 이 시에서도 제비와 황새, 제비와 뱀이 대조돼 있다. 황새나 뱀은 자연계의 강자이고 제비는 약자이다. 전체 맥락에서 보면 제비에 가탁(假託)된 일반 민중의 슬픔과 황새, 뱀에 가탁된 지배층의 횡포를 말하고 있다. 그가 제비를 보고 느낀 슬픔은 다산 개인의 슬픔과 당시 농민 전체의 슬픔이 한 덩어리가 되어 촉발된 것이다. 이것이 다산 시의 위대성이다.
물론 모든 시가 이래야 하는 건 아니다. 순전히 개인 정서를 노래한 시에도 훌륭한 작품이 많다. 평상시에는 잊고 있었던 삶의 본질이나 현상의 뒤에 가려진 은밀한 삶의 비의(秘義)를 시적 언어로 형상화해 독자에게 감동을 주면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라고 해서 현실을 외면할 권리는 없다. 특히 다산이 살았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조선은 그의 말처럼 ‘털끝 하나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사회였다. 다산은 이 병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파헤치고 그 속에서 신음하는 농민들의 참상을 고발하는 게 지식인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격정적이고 직설적인 사회시와 농민시를 대량으로 창작한 건 이런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쓴 우화시는 예술적으로도 훌륭하다. 명확한 주제 파악과 고도의 지적(知的) 통제, 세련된 형상화를 요구하는 우화시를 썼다는 건 다산이 경세가로서의 능력 못지않게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랑이가 어린 양을 잡아먹고는/입술에 붉은 피 낭자하건만/호랑이 위세가 이미 세워졌는지라/여우, 토끼 호랑이를 어질다 찬양하네.’(‘수심에 싸여 12장’ 중 제11장)
이 작품 역시 우화시다. 힘 있는 권력자에게 죄 없이 희생당해 강진에 유배된 자신을 어린 양에 비유하고 있다. 호랑이가 양을 잡아먹는 일은 자연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그 호랑이를 여우와 토끼가 어질다고 찬양한다는 발상은 순전히 상상력의 소산이다. 이 시는 다산의 개인적인 처지를 노래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풍자하고 있다. 다산이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술적 재능뿐 아니라 열린 자세로 병든 사회를 아파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가 강진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세상을 근심하고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언제나 힘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방황하며 안타까워 차마 버리지 못하는 뜻을 지닌 후에라야 바야흐로 시(詩)가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이해에만 매달리면 시라고 할 수 없다.’(‘두 아들에게’)
다산은 이처럼 근엄하고 단호하게, 그리고 공리적으로 시를 정의하고 있다. 물론 2500여 수에 달하는 다산의 시가 모두 이러한 선언적 진술에 따라 쓰인 건 아니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주는 교훈적 성격을 띤 것이다. 즉, 시를 쓰는 사람의 기본적인 자세를 높은 도덕적 차원에서 제시한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시를 쓰라는 당부로 볼 수 있다. 다산 자신도 이러한 마음가짐을 견지한 채 18년이라는 기나긴 유배생활 동안 자신의 개인적 슬픔 속에 농민들의 슬픔을 융해하면서 위대한 농민시편들을 창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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