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파오고… 사랑, 깊어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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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10일 03시 00분


연극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 ★★★★

가슴속 응어리를 삭이며 반백 년을 함께한 부부 역으로 각각 대한민국 연극대상 연기상
과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수상한 우미화(왼쪽), 박용수 씨. 극단 이루 제공
가슴속 응어리를 삭이며 반백 년을 함께한 부부 역으로 각각 대한민국 연극대상 연기상 과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수상한 우미화(왼쪽), 박용수 씨. 극단 이루 제공
국내 창작극을 접하면서 가장 아쉬운 게 ‘이야기’였다. 매력 넘치는 배우도 많고 기발한 연출가도 많지만 정작 드라마가 너무 진부하거나 얄팍한 경우가 많았다. 좀 묵직한 주제를 다룬다 싶으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스토리이고, 좀 세련된 이야기다 싶으면 구조가 너무 단선적이고 인물의 깊이가 부족했다.

극단 이루의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는 이런 아쉬움을 깨끗이 씻어준다. 부부의 인연이란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풍성한 드라마를 갖췄다. 등장인물은 저마다 기막힌 사연을 품고 있다. 코믹한 표면의 캐릭터 이면에 가슴 아픈 사연을 감추고 있다. 그 사연들이 저마다 얽히고설키면서 ‘부부의 인연’이란 작품의 큰 그림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무대는 복사꽃 흐드러지게 핀 경주의 고택이다. 극의 내레이터 격인 겸이(정인겸)는 배 속에 아기를 가진 아내와 이혼을 결심하고 부모님이 사는 이 고택에 내려온다. 무뚝뚝한, 전형적인 경상도 사내인 아버지(박용수)와 그런 아버지에게 천추의 한을 품고 있으면서도 50년 세월을 같이 산 어머니(우미화)는 돌아가실 날만 기다리는 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이웃집엔 베트남전 참전용사로 남편 박 상사(조주현)에게 온갖 구박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남편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사는 서면댁(염혜란)이 산다.

사랑이 지옥 같아진 겸이의 시각에선 ‘죽지 못해 함께 사는 것’ 같은 이들 부부의 생활상은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부부가 결별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질긴 인연이 ‘안갯속 풍경’처럼 서서히 드러난다. 여기에 연극에 끝내 등장하지 않지만 명문가에 시집와 머슴과 재혼한 할머니의 사연이 더해지면서 감동은 더 깊어진다.

그것은 지구가 도는 소리가 들린다는 아버지의 말처럼 “시간 속에 우리가 있는 게 아이더라. (우리네) 인연이 만들어 가는 게 시간이더라”는 깨우침과 맞닿는다.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것은 결국 평생 서로를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그것은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니체의 윤리적 전회(轉回)를 실천하는 것이다.

경상도 사투리를 감칠맛 나게 구사하는 배우들의 연기앙상블도 뛰어나다. 특히 동아연극상 연기상(박용수)과 대한민국 연극대상 여자연기상(우미화)을 수상한 노부부 역 배우들의 연기가 일품이다. 무대 왼쪽 복숭아나무를 무대 중앙 반투명막에 투사해 꽃 그림자를 빚어내고 들릴 듯 말 듯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려주는 무대 연출은 시적(詩的)이다. 극단 대표로 대본을 직접 쓰고 연출을 맡은 손기호 씨의 탄탄한 내공이 함빡 느껴진다.

:: i :: 15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1만5000∼3만원. 02-747-3226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연극#연극리뷰#복사꽃지면송화날리고#창작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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