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다함께 1부/당당히 일어서는 다문화가족]<3>IBK기업은행 입사한 고졸 대만여성 당혜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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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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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보다 실력” 마음 다졌더니… 은행문이 열렸어요

구직자와 기업을 연결하는 KBS 프로그램 ‘스카우트’(왼쪽). 당혜미 씨는 만학도를 위한 자유적금 통장을 결선 아이디어로 내서 채용됐다. KBS 화면 캡처
구직자와 기업을 연결하는 KBS 프로그램 ‘스카우트’(왼쪽). 당혜미 씨는 만학도를 위한 자유적금 통장을 결선 아이디어로 내서 채용됐다. KBS 화면 캡처
대학에 가지 못했지만 은행원 생활은 즐겁다.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준 직장이기에. 당혜미 씨는 “효도를 하면서 경력을 쌓을 수 있다”며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천안=유성열 기자 ryu@donga.com
대학에 가지 못했지만 은행원 생활은 즐겁다.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준 직장이기에. 당혜미 씨는 “효도를 하면서 경력을 쌓을 수 있다”며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천안=유성열 기자 ryu@donga.com
당혜미 씨(19·여)는 천안여상 3학년이던 지난해 말 방송국의 서바이벌 오디션에 참여했다. 구직자와 기업을 연결해주는 프로그램 ‘스카우트’가 진행한 IBK기업은행 고졸행원을 채용하는 자리였다. 전국 355곳의 특성화고교에서 추천받은 150명과 예선을, 16명과 본선을 치렀다. 결선무대에는 당 씨를 포함해 5명이 올라갔다. 채용 인원은 1명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독창적인 금융상품을 만들라는 과제를 냈다. 실제 상품화와 판매 가능성을 평가기준으로 삼았다. 당 씨는 만학도를 위해 고안한 ‘배부름(배움을 부르는) 통장’을 한 편의 콩트로 설명했다.

○ 포기하려던 순간에…

“대학 졸업했다며! 어떻게 졸업했댜?”

“‘배부름 통장’ 덕분이여. 나처럼 늘그막에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통장인데 공부 잘했다고 이자까지 올려주니 이렇게 기특한 상품이 어딨대여. 만기가 되면 노후 대비 통장으로 돌릴 수도 있당게!”

뒤늦게 대학에 입학해 25세 이상인 학생들을 위해 성적에 따른 우대금리를 적용해 등록금 마련과 공부를 돕자는 취지였다. 만기가 되면 노후 대비 통장으로 전환해 평생 고객으로 삼자는 아이디어를 덧붙였다.

심사위원인 배우 최불암 씨가 물었다. “요즘엔 거의 모두가 대학에 바로 가는데 (이 상품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당 씨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일단 취업부터 하고 대학은 나중에 가려는 학생이 많습니다.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상품 평가위원으로 참석한 기업은행 직원 15명이 만장일치로 ‘O’를 들었다. 하지만 다른 경쟁자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당 씨의 최종 점수는 100점 만점에 75점. 3등이었다. 1등을 차지한 동료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그 순간이었다. 김규태 수석부행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모두 너무 아깝습니다. 5명 모두 채용하겠습니다.” 실력과 열정과 아이디어로 당 씨가 ‘꿈의 직장’이라는 은행의 직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 남과 다르다는 사실에 한때 좌절

당 씨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태어난 대만인이다. 결혼도 한국인인 박필순 씨(50·여)와 했다. 부부는 2005년 이혼했다. 박 씨는 홀로 분식가게를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소녀는 다행히 씩씩했다. 잘 어울렸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의 고민을 풀어주는 해결사로 통했다.

그러나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언제부터인가 친구들이 놀리기 시작했다. “한국은 당 씨 성이 없다고 하던데. 너 중국인이지?”

중학교 1학년, 경북 경산으로 잠시 전학을 갔을 때는 ‘왕따’까지 당했다. 소위 ‘일진’ 학생들은 “중국어로 말해봐라”며 비아냥댔다. 돈도 빼앗았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부모의 이혼 사실도 처음 알았다. 사춘기가 찾아왔다. 어느 날은 어머니에게 “나를 왜 낳았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당 씨는 특유의 적극성으로 이런 상황을 극복했다.

“저는 늘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패는 아예 생각하지 않아요. 도움 받는 것도 두렵지 않아요. 내가 도움을 주려면 받기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도움을 주고받다 보면 모두가 마음을 열더라고요.”

힘든 상황을 묵묵히 견뎌냈다. 1년 뒤 다시 천안으로 가자 ‘전성기’가 시작됐다. 고등학생 때는 전교 학생회장이 됐다.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학생회 주도로 체육대회를 치러 교사들 사이에서도 “리더십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느덧 당 씨는 학교에서 ‘관심 없는 중국인 친구’에서 ‘제일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돼 있었다.

○ 제일 갖고 싶은 건 주민등록증

당 씨는 대학에 가고 싶었다. 다문화가정 특례입학에 응시할 수도 있었지만 생각을 고쳤다. 홀어머니가 힘들게 일하는 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일단 취업을 해서 어머니를 돕자고 결심했다.

금융권에 원서를 냈다. 고교 시절 가입한 금융자격증 동아리에 재미를 느꼈기에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떨어졌다. 성적이 나쁘지 않고 면접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외모 콤플렉스가 생겼다. 합격한 다른 친구들은 한결같이 예뻤다. 생방송 오디션에 도전한 이유는 실력만으로 평가할 것 같다는 기대에서였다.

“내 얼굴은 예쁘지 않다. 몸매도 날씬하지 않다. 하지만 단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너무 못생겨서 쳐다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안 그런가, 제군?”

본선 면접에서 군대의 조교 복장을 하고 나타나 심사위원에게 호통을 치면서 눈길을 끌었다. 심사위원이던 김상경 국제금융연수원장은 “외모에 대해 너무 자신감이 없다”면서도 “최고경영자(CEO)가 될 만한 용기와 리더십을 갖췄다”며 결선에 진출시켰다.

당 씨는 올해 1월 6일부터 충남 천안시 성정동 지점에서 근무한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객을 상대하다 보면 1주일이 금세 간다. 친구들과 밤늦게 놀고 싶어도 출근시간이 빨라서 먼저 자리를 떠야 한다. 하지만 아주 즐겁다. 지금 이 순간이.

“캠퍼스에서 연애도 하고 싶지만, 대신 효도를 하고 경력도 쌓아가니 괜찮습니다. 저는 친구들이 못 버는 돈도 벌잖아요.”

당 씨는 한국 귀화 시험을 준비하는 중이다. 외국인등록증을 보여주면 낯설게 보는 곳이 너무 많아서다. 어려서부터 주민등록증이 제일 갖고 싶었다. 그는 가끔씩 싸늘한 시선을 던지는 한국인에게도 이렇게 당부했다.

“다문화가정 사람도 한국인 못지않게 한국을 사랑합니다. 신뢰가 중요한 은행에서도 저를 뽑았잖아요? 겉모습보다는 내면을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은행원으로서 어려운 분들을 도우며 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스카우트#IBK#고졸#은행원#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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