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서울 강동구 암사동 자택에서 만난 여운택 옹은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의 첫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도 웃지 못했다. 일본 정부가 그의 피해 사실을 인정한 것은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 집나이로 구순(九旬)이 되면서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 힘도 없다”면서도 “일본이 배상할 때까지 힘을 내겠다”고 말했다.
192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여 옹은 17세 때 평양의 한 이발소에서 조수로 일했다. 1943년 9월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그는 월급도 많이 주고 공부도 시켜 준다는 일본 기업의 거짓말에 속아 오사카 일본제철소로 갔다. 그는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하루 10시간씩 일했지만 하루치 식사를 3일 동안 나눠 먹게 해 늘 굶주렸다”며 “일본인은 야구방망이 크기의 ‘정신봉’으로 우리를 수없이 때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일본인은 매달 담배 2갑 값만 용돈조로 줬다. 기숙사 벽에 한국인 이름과 적금 명세를 표로 그려놓고 “나중에 한꺼번에 찾아갈 수 있다”고 속였다. 그는 “당시 현장에 있던 한국인들은 고국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고통을 이겨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 기업인은 도망쳤다.
1997년 12월 여 옹은 광복 당시 황소 10마리 값인 460여 엔의 미불임금이 오사카공탁소에 남아 있는 사실을 알고 지급을 요구하는 소송을 일본 오사카지방법원에 냈다. 일본 법원은 한일협정을 이유로 일본 기업의 손을 들어줬다. 한국 법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15년 동안 양국 법정에서 싸우는 사이 많은 동료들이 절망 속에서 죽었다”며 “젊은 세대들이 일본보다 부유한 나라를 만들어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손해배상 소송을 함께 낸 신천수 옹(86)도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10년 넘게 일본까지 가서 외롭게 싸웠지만 매번 절망했는데 오늘은 말할 수 없이 기쁘다”며 “일본에 끌려가 피해를 본 위안부 여성 등 한국인 모두가 배상받는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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