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귀도치 초등학교의 레자네 헤자니 선생님은 아홉 살 길레르미가 삐딱하게 쓴 파란색 모자를 바로잡아 줬다. 선생님이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오늘은 친구들과 마음껏 잔디밭 축구장을 뛰어보라”며 등을 토닥거리자 길레르미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수줍게 웃었다. 또래보다 덩치가 큰 길레르미는 1년 전부터 마약에 손을 댔다. 그 뒤 학교는 그에게 ‘가끔 가는 곳’이 됐다. 브라질 사람들이 전형적인 빈민촌을 부르는 말인 ‘파벨라’에서 어머니와 살고 있는 아이는 처음엔 용돈을 벌기 위해 마약 운반을 했다. 급기야 직접 흡입하기에 이르렀다. 헤자니 선생님은 운동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길레르미를 보며 “몇 주 동안 학교를 나오지 않던 아이가 축구교실이 열린다는 말을 듣고는 오늘은 제일 먼저 등교했다”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남반구의 가을이 절정에 이르렀지만 햇살은 여전히 따가운 7일 오후. 브라질 상파울루 주 피라시카바 시의 킹지 스타디움에 모인 주변 윌슨귀도치와 이지말라포주니어 초등학교의 남녀 학생 50여 명은 바르다스 네그리 피라시카바 시장의 입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오늘 우리는 이 지역에 공장을 짓는 한국의 현대자동차와 우리가 사랑하는 킹지 축구단, 그리고 시 정부가 힘을 합쳐 ‘현대차 유소년 축구 교실’을 열겠습니다.”
네그리 시장이 개회를 선언하자 아이들뿐 아니라 관람석에 앉아 있던 100여 명의 지역주민과 학부모들도 뜨거운 박수와 환호성을 쏟아냈다.
○ CSR의 새로운 모델 만든 현대차
유소년 축구교실은 현대차가 이 지역에 짓고 있는 자동차 공장의 준공을 앞두고 마련한 사회공헌활동(CSR) 프로그램이다. 지역 축구단인 킹지 팀의 경기가 열리지 않는 매주 월, 목요일 오후에 초등학생 40∼50여 명을 스타디움으로 불러 축구기술은 물론 인성 교육도 함께 하자는 취지다.
당초 시 정부는 킹지 축구단을 후원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현대차는 단순한 금전적 후원을 넘어 지역사회에 의미 있는 도움을 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민경환 현대차 브라질법인 부장은 “대부분 기업의 해외 CSR는 특정 단체에 정기적으로 돈을 주며 후원하는 틀에 박힌 것인데 우리는 뭔가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현대차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CSR를 찾다 결국 킹지 축구단이 경기가 없는 날을 이용해 △축구단 코치와 선수들이 초등학생들에게 축구를 지도하고 △시 정부는 이를 정규 체육과목으로 지정하며 △현대차는 전체적인 프로그램을 짜고 비용을 대는 이른바 ‘3자 CSR 모델’을 만들어냈다.
네그리 시장은 “브라질 아이들은 모두 축구를 좋아하지만 공립초등학교 학생들은 대체로 생활형편이 넉넉지 않아 체계적으로 축구를 배울 기회가 없다”며 “이번에 현대차 축구교실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지역 내 초등학교들의 참가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 “축구 배우니까 정말 행복해요”
“베드로, 약속한 곳으로 공을 보내야지. 여의치 않으면 같은 팀 친구들과 미리 얘기하면서 게임을 하는 게 원칙이야.”
현대차의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쓴 학생들이 흰색과 파란색 조끼를 나눠 입고 경기를 하는 동안에도 킹지 축구단의 베테랑 코치인 매니 페르난데스 씨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지켜보며 따끔하게 지적했다.
페르난데스 코치는 “브라질에서 축구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서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원칙을 지키는 법을 배우는 인성교육의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 헤자니 선생님도 “파벨라 출신 아이들은 축구 아니면 마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며 “현대차의 유소년 축구교실은 이런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브라질의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축구라는 스포츠를 통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 축구 용어를 통해 언어를 가르치고, 축구장의 크기와 모양, 선수들 유니폼에 적힌 숫자 등을 이용해 기본적인 수학을 교육하는 식이다.
연신 두 팔을 머리 위로 교차해 뻗어 킹지 축구단을 상징하는 로마 문자 ‘Ⅹ’를 그리며 뛰어다니던 프란셀라(10·여)는 “다른 학교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배우는 게 너무 행복하다”며 “이런 기회가 더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시간가량의 축구교실이 끝나자 아이들은 빵과 음료수, 바나나가 든 간식 세트를 하나씩 받아들고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현대차 공장을 견학했다. 139만 m²(약 42만 평)의 거대한 사탕수수밭에 들어선 이 공장에서 2000여 명이 일할 거라는 현대차 측의 설명에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 CSR는 브라질 사업에 필수
최근 몇 년 사이 성장세가 둔화되긴 했지만 브라질은 무한한 시장 잠재력 때문에 다국적 기업들의 CSR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칼자루를 쥔 브라질 같은 신흥국들은 외국기업이 자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일정부분 사회적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특히 2008년 이후 세계적으로 글로벌 금융·재정위기를 겪은 뒤로는 더욱 그렇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투자를 하는 바람에 국고가 바닥을 드러내자 정부가 다국적 기업들을 대상으로 서민층을 위한 복지사업에 적극 나설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 공장이 들어선 피라시카바에서도 다국적 철강기업인 아르셀로미탈이 시각장애인들을 돕고 있고 미국의 중장비업체 캐터필러는 지역민을 위한 스포츠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유재원 KOTRA 상파울루 무역관장은 “브라질에서 지속가능한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CSR는 필수”라며 “한국 기업들도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좋은 이미지를 쌓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는 세계 4위의 자동차 시장인 브라질에서 유소년 축구교실을 운영하는 것 외에 빈민촌에 집을 지어주는 해비탯 운동에 한국 대학생 봉사자들을 파견하고, 다민족 다문화 국가인 브라질의 국민적 화합을 유도하기 위해 열리는 다문화 축제도 후원하고 있다.
한창균 현대차 브라질법인장은 “글로벌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한 현대차에 브라질에서의 CSR란 지역민에게 단순히 도움을 주는 것을 넘어 위기관리, 미래의 고객 발굴을 위한 장기적인 투자의 개념까지 포함한다”고 설명했다.
피라시카바=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한창균 현대차 브라질법인장 “이공계 대학생 해외유학도 지원… 사랑받는 기업 될 것”▼
“브라질 에 푸트볼(브라질은 축구의 나라)!”
현대자동차 유소년 축구교실이 처음 열린 7일 오후 브라질 피라시카바 시의 킹지 스타디움. 중년의 동양인이 연단에 올라 현지 언어로 이렇게 말하자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지역 주민과 아이들의 뜨거운 반응에 고무된 한창균 현대차 브라질법인장(사진)은 “현대차와 킹지 축구단, 피라시카바 시정부가 브라질 어린이들의 미래를 위해 함께 나가자”라며 축사를 마무리했다.
이날 행사는 현대차가 진행하는 글로벌 사회공헌활동 프로그램 가운데 규모가 작은 편이었지만 학부모들을 비롯해 지역민 100여 명이 스타디움을 찾았다.
현대차 유럽법인장을 지내다 한 달 전 브라질에 부임한 한 법인장은 “말로만 듣던 브라질 국민의 축구에 대한 열정을 온몸으로 느꼈다”며 “유소년 축구교실을 잘 운영해 현대차 브라질법인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 법인장은 3일에도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브라질 고등교육재단(CAPES)과 이공계 대학생을 해외 우수대학으로 유학을 보내는 내용의 ‘국경 없는 과학’ 프로젝트 후원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기도 했다.
지난해 브라질 자동차 시장에서 약 3.3%의 점유율을 보이는 등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현대차는 올 하반기 현지 공장을 완공해 브라질형 소형차를 연간 15만 대씩 생산할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현대차 피라시카바 현지 공장에서만 2000여 개, 협력회사까지 포함하면 5000여 개, 전후방 연관 고용효과까지 합치면 2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
한 법인장은 “브라질에서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하고 있지만 가장 본질적이고도 중요한 것은 역시 일자리 창출”이라며 “항상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고 현대차가 브라질에서 ‘사랑받는 기업’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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