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 라구나 주 칼람바 시에 있는 로옥은 전형적인 도시 빈촌이다. 마닐라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인 이 마을 190여 가구의 주민은 주로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일하거나 트라이시클(삼륜택시)을 몰아 돈을 번다. 고기잡이로 연명하는 사람도 많다. 오후 1시,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어른들은 얼기설기 얽어놓은 대나무집 그늘 밑에 늘어져 있고 맨발의 아이들은 흙바닥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 동네는 오랜 무력감에 휩싸여 있었다. 열심히 살아도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은…. 》 ○ 가난도 막을 수 없는 학업에의 열정
제넬린 로메로 씨(19·여)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일찌감치 학업을 중단하고 가까운 도시에서 7년째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7명의 동생을 돌본다. 존존 에밀리아호 씨(19·여)도 일하는 엄마 대신 동생들을 돌보느라 오래전에 학교를 그만뒀다.
필리핀 정부는 초등학교 6년과 고등학교 4년 등 총 10년간 무료교육을 제공하지만 로메로 씨와 에밀리아호 씨가 사는 로옥 마을 아이들은 태반이 학교에 가지 못한다. 식비는 물론이고 교복 교재 필기구 비용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 때문에 교육을 못 받고 빈곤이 깊어지는 악순환이 대물림되는 곳이 로옥이다.
다행히 이곳 아이들이 배움에 대한 열정마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지난달 12일 마을 어귀의 작은 간이교실에서 만난 로메로 씨와 에밀리아호 씨는 시교육청이 제공하는 무료 보충학습시간에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분수 문제를 풀고 있었다. 한참 아래 동생뻘 아이 8명과 함께였지만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강사로 파견된 교육청 직원은 “일주일에 두 번 보충수업을 하고 있다”며 “이 외에 삼성전기도 최근 사회공헌활동으로 보충학습을 다시 시작해 아이들이 배움의 끈을 이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1997년 12월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 법인을 세워 스마트폰의 필수 부품인 적층세라믹콘덴서(MLCC)를 만들고 있는 삼성전기는 로옥 마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2006년 학습봉사를 시작했다. 2009년 장학금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일시적으로 학습봉사를 중단했지만 올해 3월 재개했다.
시교육청의 보충수업이 끝난 뒤 파란 조끼를 입은 삼성전기 직원들이 교실로 들어왔다. 마을 어디선가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청소년들도 우르르 이들과 함께 교실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삼성전기에서 왔습니다. 다음 주 보충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다들 얼마나 학교에 다녔는지 조사할 거예요.”
이날 삼성전기의 보충학습에 추가 등록한 10대는 31명이다. 수업은 17일부터 시작됐다. 일주일에 두 번 오전 8시부터 낮 12시까지 4시간씩 진행된다. 최소 1년 이상 공부해야 한국의 검정고시 격인 ALS시험을 통과할 수 있지만 로메로 씨는 꿈에 부풀었다. 그는 “이 수업이 없다면 평생 가사도우미 일만 해야겠죠”라며 큰 눈을 깜박였다.
○ 4년 연속 최우수 사회공헌 기업 영예
삼성전기 봉사단의 보충수업이 로옥 청소년들의 꿈을 직접 키워주는 ‘샘물’이라면 칼람바 시 마하다 마을 청소년들에게 주는 장학금은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비타민’이다.
가난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아리엘 폴리엔테스 씨(19)는 고교 4학년 때 삼성전기의 장학금제도를 알게 됐다. 40명이 장학금을 신청했는데 지원자로 선정된 4명에 포함됐다. 그는 “지원 대상자에 내 이름이 있는 걸 보고 무엇보다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장학금은 아날린 사가도 양(16)에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줬다. 사가도 양의 집은 하루 식비가 100페소(약 2700원)에 그칠 정도로 가난하지만 엄마는 학교에 가는 딸에게 하루 50페소를 준다. 왕복 차비를 빼면 10페소만 남아 점심을 거르는 날도 많았다.
그런 사가도 양에게 삼성전기가 연간 1만2000페소(약 32만4600원)의 장학금을 준 것이다. 사가도 양은 “삼성전기 덕분에 수학여행으로 TV에서나 봤던 마닐라의 놀이공원 ‘스타시티’에도 갈 수 있었다”며 “스타시티는 학창 시절의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기 필리핀법인은 2002년 로옥에 펌프 4대를 설치해주면서 사회공헌을 시작했다. 김영권 삼성전기 차장은 “물을 길어오는 곳이 멀어 밥하고 빨래하는 것이 불편하고 화장실도 없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삼성전기는 칼람바 시와 자매결연을 해 마을 아동 탁아시설에 도서관을 만들어주는 한편 TV와 책상 등 시설물을 기증했다. 2005년부터는 매년 두 차례 로옥과 마하다 지역 300여 가구를 대상으로 급식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곳 아이들은 60% 정도가 하루 세 끼 중 한 끼만 제대로 먹는다.
지난해 한 봉사단체가 마하다 지역에 7만 가구를 지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건축자재를 기부하는 한편 완성된 집 벽에 페인트칠을 하는 작업도 도왔다. 집 주위엔 채소도 심었다.
이런 노력이 지속되면서 삼성전기 필리핀법인은 지난해 필리핀 정부가 주는 사회공헌 분야 최우수 기업상을 받았다. 이 상은 필리핀 투자청(PEZA)에 등록된 업체 중 한 해 동안 사회공헌에 가장 크게 기여한 회사를 선정해 수여하는 것이다. 삼성전기 필리핀법인은 이 상을 수여하면서 지난해까지 4년 연속 최우수 사회공헌 기업으로 선정돼 필리핀 투자청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 “이곳을 찾은 분들이 행복하도록”
봉사를 하다 보면 미처 예상치 못한 일에 부닥친다. 12일 삼성전기 봉사단이 로옥을 찾은 날도 그랬다.
보충수업을 위한 면담이 끝나갈 무렵인 오후 3시 반, 누군가가 외쳤다. “마을회관으로 가세요. 공연을 할 거예요.” 삼성전기 직원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공연이라니? 공연을 준비했어요?”
마을 중앙에 있는 작은 회관으로 달려갔다. 이미 적지 않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형편 닿는 대로 옷을 맞춰 입은 앙증맞은 4∼6세 꼬마아이들부터 10대 남자아이들까지 로옥 마을 어린이들이 모두 모인 듯했다.
“우리는 하나예요∼.” 흥겨운 아이들의 노래와 외침에 무력감에 빠졌던 마을에 갑자기 활기가 넘쳤다. 방금 전까지 흙에서 뒹굴던 아이들이 삼성전기를 위해 학예회 공연을 연습했다는 얘기에 봉사단원들의 콧날이 시큰해졌다.
꼬마들의 공연이 끝나자 10대 남자아이들이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을 연상시키는 힘이 넘치는 춤을 선보였다. 이들은 땀방울을 훔쳐내며 “로옥을 찾아준 삼성전기 봉사단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쁨을 주고 싶다는 이들의 말에 삼성전기 봉사단원 라셀 마라빌라 씨는 “가슴이 벅차다. 지금보다 더 많이 잘해주고 싶어졌다”며 아이들을 향해 활짝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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