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호 태풍 ‘볼라벤(BOLAVEN·라오스의 고원 이름)’은 남서해안 일대에서는 60t짜리 테트라포드(방파제로 사용하는 거대한 돌)도 공깃돌처럼 집어 던질 정도로 강한 위력을 보였다. 석탄운반선이 좌초되면서 두 동강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최악의 피해는 피했다. 2002년 246명의 사망·실종자를 낸 루사는 내륙에 상륙해 바다로 빠져나갈 때까지 24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사이 북쪽의 차가운 공기 덩어리가 태풍과 부딪쳐 전국에 엄청난 빗줄기를 퍼부었다. 반면 볼라벤은 28일 오전 6시 목포 서남쪽 해상을 출발해 오후 4시 북한에 상륙하기까지 불과 10시간 만에 서해를 종단했다. 강한 바람이 깔려 있던 비구름대를 밀어내 서울 등 중부지방에는 비가 적게 내려 피해가 확산되지 않았다. 서·남해안 상당수 지역에서는 역대 최대 풍속 기록을 갈아 치웠지만 서울에서는 이날 오후 9시 현재까지 초속 18.8m가 가장 강한 바람이었다. 2010년 태풍 곤파스 때 초속 21.6m보다도 약했다. 다만 태풍 반경이 최대 400km를 넘어 서울 등 중부지방 일대는 태풍이 지나간 뒤인 자정 무렵까지도 굉음을 동반한 거센 바람이 이어졌다.
○ 강풍에 사망 사고 잇따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28일 오후 10시 현재 볼라벤으로 모두 19명의 사망·실종자(중국선원 사망 5명, 실종 10명 포함)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이날 낮 12시경에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나교리 단독주택 옥상에서 고추 말리는 건조기에 비닐을 씌우던 정모 씨(73·여)가 강풍에 건조기와 함께 4m 아래 바닥으로 떨어져 숨졌다. 이날 오후 광주 서구 유덕동의 한 주택에서는 잠자던 임모 씨(89·여)가 강풍에 무너진 벽돌 더미와 지붕에 깔려 숨지는 사고도 발생했다. 경찰은 5, 6층 높이의 인근 교회 종탑의 벽돌 일부가 무너져 임 씨의 집을 덮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 중이다.
○ 여객선 항공기 무더기 결항
태풍의 직격탄을 맞은 제주지역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가로수가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히고 교통신호등은 맥없이 기울어졌다. 상가 간판은 뜯겨 나가 도로 구석에 박히거나 강풍에 쓸려 이리저리 뒹굴었다.
제주도는 여객선 운항이 금지되고 항공기가 결항해 한때 ‘고립된 섬’이 되기도 했다.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포구에서는 정박 중이던 10t 미만 어선 5척이 침몰하고 방파제 50m가 유실됐다.
○ 연안 섬들 고립 상태
이날 오전 8시경 전남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에는 아파트 15층 높이인 40m 파도가 들이쳤다. 이로 인해 방파제(길이 480m)의 4분의 1이 주저앉았다. 한반도 태풍의 길목인 가거도를 관통한 볼라벤의 위력은 대단했다. 집이 흔들릴 정도로 강풍이 불자 가거도리1구 주민 396명은 산 중턱 마을회관으로 긴급 대피했다.
가거도는 육지와 섬을 이어주는 통신철탑이 강풍에 부서지면서 유무선 통신도 끊겼다. 현재 유일한 통신수단은 독실산(해발 639m) 레이더 기지에 있는 위성전화 한 대뿐이다. 가거도 레이더 기지에 근무하는 경찰관은 위성전화를 통해 “현재 가거도는 일반전화와 휴대전화, 인터넷이 안 돼 고립무원의 상태”라고 말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이날 여객선 96개 항로, 선박 171척의 운행이 통제되고 김포 제주를 오가는 노선 등 국내선 77개, 국제선 117개 항공기가 결항됐다고 밝혔다. 태풍으로 인천국제공항으로 이어지는 송도국제도시∼영종도 간 인천대교를 비롯해 고속도로 2개 구간과 일반도로 25곳이 통제됐지만 오후 10시 현재 통제 구간은 11곳으로 줄었다.
○ 재산 피해 더 늘 듯
볼라벤의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176만7000가구가 정전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이 중 95%에 이르는 168만4000가구는 이날 중 복구됐다. 호남화력과 보령화력 1, 2호기, 보령복합 1∼3회 등 발전소 가동도 정지됐으며 이 중 보령화력 1, 2호기와 보령복합 1∼3호기는 이날 오후 들어 발전을 재개했다. 이로 인해 군산제2산업단지, 대불산업단지, 주안산업단지도 정전 피해를 입었다.
공사 현장에서는 강풍에 크레인이 넘어지는 곳이 속출했고, 국보 67호인 구례 화엄사 각황전 기와와 보물 396호인 여수 흥국사 대웅전 용마루(기와) 일부가 파손되기도 했다.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재산 피해는 집계가 계속되는 대로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2002년 태풍 루사 때는 5조1479억 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고, 이듬해 태풍 매미 때는 4조2225억 원의 재산 피해가 났다.
신안=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