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장 ‘무늬만 공모’]<上>對국민 사기극 변질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3일 03시 00분


낙하산 1명과 들러리들… “짜고 치는 게임”


#1 “위에서 점찍어둔 사람이 도저히 ‘감’이 안 되는 인물이면 우리만 이래저래 피곤해지죠.” 한 정부부처의 인사담당 공무원 A 씨는 이 정부 들어서 공공기관장 공모를 여러 차례 치렀다. 원칙적으로 그의 업무는 추천위원들의 심사 과정을 지원하는 것이지만 실상은 ‘지도감독’을 해야 한다고 했다.

A 씨가 털어놓은 그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낙하산 지원자가 다른 후보 1, 2명과 함께 최종후보 리스트에 들도록 점수를 ‘적정 수준’으로 관리하는 일”이다. 사실상 낙점을 받은 인물을 장관이 부담 없이 선택해 제청할 수 있도록 ‘사전 정지(整地)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걸 추천위원들이 알도록 직간접적으로 넌지시 귀띔하는 게 꼭 필요한 테크닉이다. 그는 “위원들의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리지 않으면서 ‘요지’를 전달하는 게 매우 어렵다”고도 했다. ‘낙하산’이 너무 두드러지게 좋은 점수를 받아도 곤란하다. 괜한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2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모르고 (공공기관장 공모에) 지원했던 바보스러운 내 모습에 절망한다. 이번 응모를 포기한다.” 올해 초 지식경제부 산하 공기업의 사장 공모에 지원했던 공기업 간부 출신 B 씨는 사장 확정을 불과 며칠 앞두고 지경부 고위 당국자에게 이런 내용이 포함된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B 씨는 지경부 고위공무원 출신인 C 씨를 포함한 최종 후보 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공모가 끝나기도 전에 B 씨가 이런 메시지를 보낸 건 “C 씨가 사실상 내정됐다”는 이야기가 관가에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었다. B 씨는 경력이나 경험에서 자신이 적임자라고 생각했지만 이 이야기가 단순한 추측성 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하고 문자메시지로 포기 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2개월 정도 걸린 공모 과정이 ‘짜고 치는 게임’처럼 비치게 되자 지경부 측은 “사장이 내정됐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투명하게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며칠 뒤 안팎의 예상대로 C 씨가 사장으로 낙점됐다.

공모 과정에서 추천위원이나 ‘들러리’ 후보를 서본 경험이 있는 인사들은 하나같이 현재의 기관장 공모 과정을 ‘졸속’이나 ‘파행’ 같은 말로 표현한다. 일각에서는 “공모제는 한 명의 낙하산과 여러 명의 바보가 벌이는 대(對)국민 사기극”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 뽑기도 전에 내정

공공기관장 공모제는 투명하고 공정한 인사, 다방면의 유능한 인재 영입을 위해 공개적으로 지원자를 모집해 가장 적합한 인물을 뽑는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취지와는 거리가 멀다.

정권 수립의 공신(功臣)이나 퇴직 고위 관료에게 공기업 기관장 자리는 전리품이나 퇴직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실제는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인물을 선정하면서 공모라는 형식만 빌려 ‘면죄부’를 주는 최악의 정책”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공공기관 기관장 및 감사 등의 추천 과정에 여러 차례 참가한 한 사립대 교수는 “해당 부처에서 지원자들에 관한 자료를 회의 전날쯤 택배로 받고 다음 날 불려가 3배수, 또는 5배수 등으로 이름을 적고 나오는 게 보통”이라며 “후보자의 경력 등을 검토하거나 위원들끼리 논의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올 초 한 공공기관 사장의 추천위원장을 맡았던 D 교수도 “동료 추천위원을 통해 ‘위(청와대)에서 이번엔 이 사람을 밀어줬으면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보통 이런 전화는 실권을 행사하는 곳에서 직접 오지 않고 정권 실세그룹이나 해당 부처와 관련을 맺고 있는 교수 등 민간인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온다”고 덧붙였다.

‘위’에서 귀띔이 없어도 추천위원들은 면접 과정에서 누가 ‘낙하산’인지 파악하는 경우도 있다. D 교수는 “정치인 출신의 한 지원자는 변변한 경력, 경험이 없는데도 면접 내내 ‘어차피 될 건데 왜 당신들이 귀찮게 구느냐’는 식이었다”며 “그땐 ‘뭘 믿고 저러나’ 싶었는데 결국 사장이 된 걸 보니 믿는 구석이 확실했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추천위원들은 낙하산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게 대부분이다. 추천위원을 지낸 한 공공기관의 전직 사외이사 E 교수는 “혼자 반대하는 의견을 내봤자 (위에서 찍은 사람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괜한 원한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 1등도 안심 못해

추천위원들이 뽑아 주무부처의 ‘승인’이 난 다음에도 전문성, 경영능력이 아닌 예기치 못한 변수로 인사가 막판에 뒤집히는 사례도 적지 않다. 대개 출신 지역, 학교, 정치색 등이 문제가 된다.

경제부처 공무원 생활을 30여 년간 하고 2008년 퇴임한 F 씨는 지난해 한 공기업의 기관장 공모에 참여했다. 7, 8명이 지원했지만 면접 등을 거쳐 3명으로 추려졌고 F 씨는 2, 3등을 압도적인 점수차로 따돌린 1등으로 청와대에 제청됐다. 해당 부처를 통해 이런 사실을 들은 F 씨는 주변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신변 정리까지 마쳤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운명이 뒤집혔고 면접에서 3등을 한 인물이 기관장으로 뽑혔다. F 씨는 “최종 관문에서 이전 정부의 유력 정치인과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점이 문제가 됐다고 들었다”면서 “그 사람과 개인적인 자리에서 술 한잔 한 적도 없는데…”라며 답답해했다.

정치적인 지역안배 차원에서 결과가 뒤바뀌는 일도 있다.

최근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공모에는 세 명이 최종후보로 올랐고 이 중 한 명이 단독 제청됐다. 하지만 청와대는 기존 기관장인 안택수 이사장을 유임시키기로 결정했다. ‘위’에서 결정이 뒤집어진 사실을 알지 못하는 신용보증기금 직원들이 안 이사장을 위해 송별회를 여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번 ‘들러리’가 돼 본 후보들은 이후에 다시 공모 기회가 왔을 때 제일 먼저 ‘윗선’에 줄을 대 후보자가 내정됐는지부터 파악한다. 특별한 귀띔을 받지 않으면 알아서 지원을 포기하는 사례가 늘어 해당 정부부처의 공모제 담당 공무원들은 ‘쓸 만한 들러리’ 확보에 애를 먹고 있다.

한 번 들러리를 선 이후 공공기관장 공모를 포기한 한 공무원 출신 인사는 “낙점을 받지 않고도 계속 지원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찍은 인물의 문제점이 드러나 낙마할 경우의 ‘횡재’를 노리거나, 자신의 존재를 알려 다른 기회를 얻으려는 스펙 관리 목적에서 공모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공공기관장#낙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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